영국에 도착했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고 정착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을 터이니 믿음을 잃지 말고 유연하게, 성실하게, 정진해야 할 것이다.
내가 머무는 공동체에 'KEEP CALM PUT THE KETTLE ON'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머그컵이 하나 있었다. 참으로 영국인다운 문구다. 차를 마시는 문화가 그들에게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차를 끓여 마시면서 마음도 가라앉히고 앞으로의 행동 방식도 생각하는 습관이 있나 보다. 아니, 차를 습관처럼 즐겨 마시니, 일단 차를 끓이는 행위 자체가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지도 모른다.
나도 영국에 왔으니 기왕 좋아하는 차를 좀 더 '적극'적으로 마실란다. 변화무쌍한 날씨에 따스한 차 한 잔이 제격일 것이고, 무엇보다도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서서 그분이 주님이심을 되새기게 해 줄 터이니...
Monday, 16 September 2013
Sunday, 8 September 2013
예수님의 몸 - The Body of Christ
어린 조카와 함께 미사에 참례했다.
영성체를 하고 난 내게 조카가 물었다.
'삼촌, 하얀 거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대답해 주었다.
'응, 그건 예수님의 몸이야. 하얀 빵을 먹으면 예수님이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시는 거야.'
그리고 나서 생각했다.
예수님을 모신 내가 달라진 것이 있는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다면서 그전과 달라진 것이 있는 것일까...
우리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몸을 모신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조카에게 해 준 답변 앞에서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I went to Mass with my young nephew.
After I received the holy communion, he asked me.
'Uncle, what happens after you eat that white thing?'
I answered, 'Well, that is the Body of Christ. If you eat the white bread, Jesus enters into your heart.'
And then I thought to myself.
Am I changed after receiving the Body of Christ?
Is there anything different in me after receiving Him into my heart?
If my hearts and attitudes are not changed,
what is the point of receiving the holy communion?
And I was ashamed of myself at my answer to the nephew.
영성체를 하고 난 내게 조카가 물었다.
'삼촌, 하얀 거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내가 대답해 주었다.
'응, 그건 예수님의 몸이야. 하얀 빵을 먹으면 예수님이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시는 거야.'
그리고 나서 생각했다.
예수님을 모신 내가 달라진 것이 있는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다면서 그전과 달라진 것이 있는 것일까...
우리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몸을 모신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조카에게 해 준 답변 앞에서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I went to Mass with my young nephew.
After I received the holy communion, he asked me.
'Uncle, what happens after you eat that white thing?'
I answered, 'Well, that is the Body of Christ. If you eat the white bread, Jesus enters into your heart.'
And then I thought to myself.
Am I changed after receiving the Body of Christ?
Is there anything different in me after receiving Him into my heart?
If my hearts and attitudes are not changed,
what is the point of receiving the holy communion?
And I was ashamed of myself at my answer to the nephew.
Tuesday, 3 September 2013
Sunday, 1 September 2013
추억의 기록
다가오는 토요일, 영국으로 가는 날이다.
그 동안 미뤄오던 짐꾸리기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서 책이며, 옷이며, 신발이며
하나씩 하나씩 챙기기 시작했다.
챙길 것과 처분할 것, 간직할 것과 없앨 것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저기 쌓여 있던 소지품들을 살피다가 철학기 때 쓴 일기장과 피정 기록, 실습지 미얀마에서 찍은 사진, 미얀마 지인들이 남긴 편지들... 이렇듯 지난 추억의 기록들을 접하게 되었다. 짐을 챙기다 말고 한참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추억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지나간 일의 자세한 정황을 다시 기억하게 하기도 하는가 하면, 내게 배려와 사랑을 보내주신 주변분들의 마음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그동안 잊고 있었건만 지난 날 어떤 이유에서든지 나를 챙겨준 분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리도 나는 힘들고 속상했던 일만 기억하고, 감사하고 기뻤던 일은 이다지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걸까...
미얀마에서 돌아온 지 반 년 가까이 고국에서 다시 작은 추억을 만들고 나서, 이제는 머나먼 영국에서 새로운 추억을 쌓으러 곧 떠난다. 설레임과 두려움... 실과 바늘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이 두 가지 감정. 출국 날짜가 다가올 수록 더욱 뚜렷하게 올라오는 감정이다. 아마 밉든 곱든 정들었던 곳을 추억으로 남기고 떠나는 이에게는 익숙한 감정일 것이다.
과거의 추억과 은총에 감사드리고 새로운 앞날을 기약하면서 남은 준비를 착실히 마치자고 다짐해 본다.
여기저기 쌓여 있던 소지품들을 살피다가 철학기 때 쓴 일기장과 피정 기록, 실습지 미얀마에서 찍은 사진, 미얀마 지인들이 남긴 편지들... 이렇듯 지난 추억의 기록들을 접하게 되었다. 짐을 챙기다 말고 한참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추억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지나간 일의 자세한 정황을 다시 기억하게 하기도 하는가 하면, 내게 배려와 사랑을 보내주신 주변분들의 마음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그동안 잊고 있었건만 지난 날 어떤 이유에서든지 나를 챙겨준 분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리도 나는 힘들고 속상했던 일만 기억하고, 감사하고 기뻤던 일은 이다지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걸까...
미얀마에서 돌아온 지 반 년 가까이 고국에서 다시 작은 추억을 만들고 나서, 이제는 머나먼 영국에서 새로운 추억을 쌓으러 곧 떠난다. 설레임과 두려움... 실과 바늘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이 두 가지 감정. 출국 날짜가 다가올 수록 더욱 뚜렷하게 올라오는 감정이다. 아마 밉든 곱든 정들었던 곳을 추억으로 남기고 떠나는 이에게는 익숙한 감정일 것이다.
과거의 추억과 은총에 감사드리고 새로운 앞날을 기약하면서 남은 준비를 착실히 마치자고 다짐해 본다.
Wednesday, 28 August 2013
I have a dream
2013년 8월 28일 오늘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그 유명한 연설 'I have a dream'이 워싱턴에서 당당하게 선포된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암울한 소식과 상황들만 눈에 들어오는 것 같은 요즈음... 과거를 잊지 않되 미래를 바라보는 '꿈' 혹은 '비전'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태도인지...
미얀마에서 Public Speaking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면서 유명한 몇몇 연설문들을 학생들과 함께 나누었었는데, 그 때도 이 유명한 연설을 학생들에게 읽고 낭독하도록 했던 기억이 난다. 우연히 BBC에서 발견한 영상물을 그들과 다시 나눌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마틴 목사님은 인류에게 정의와 평등이 자리잡는 것을 끝끝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지만,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형제애를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http://www.bbc.co.uk/news/magazine-23853578
미얀마에서 Public Speaking이라는 과목을 가르치면서 유명한 몇몇 연설문들을 학생들과 함께 나누었었는데, 그 때도 이 유명한 연설을 학생들에게 읽고 낭독하도록 했던 기억이 난다. 우연히 BBC에서 발견한 영상물을 그들과 다시 나눌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마틴 목사님은 인류에게 정의와 평등이 자리잡는 것을 끝끝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지만,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형제애를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http://www.bbc.co.uk/news/magazine-23853578
Wednesday, 21 August 2013
번역과 글쓰기, 그리고 나의 블로그
"번역과 일본의 근대(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라는 책을 읽었다. 에도 막부와 메이지 시대를 거치는 근대화의 여정이 번역'에' 미친 영향과 그 번역'이' 다시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을 다룬 두 일본 지식인의 대담이었다.
그토록 철저한 호기심과 목적의식을 가지고 번역에 가담한 일본 사회의 풍토가 놀라웠다.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접하는 많은 번역어들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한번 쯤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다.
나는 비록 전문 번역가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 번역을 하게 된다. 매번 최선을 다해서 번역을 해보려 하지만 항상 어휘와 표현 앞에서 고민과 좌절을 하게 된다. 그만큼 번역은 쉽지 않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많은 이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이지도 모른다.
아, 한 가지 나 자신을 위한 변명... 이 블로그에 끄적이면서 되도록 우리 말과 영어 두 언어를 모두 써서 작성해 보려고 했으나, 짧은 영어 실력과 부족한 표현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그러다 보니 흘러가는 물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단상들을 가끔이라도 글로 잡아 놓으려는 내 시도가 너무 버거운 일이 되어 버린다. 이제부터 한글로 쓸 것은 한글로 쓰고, 혹시 영어로 쓸 일이 있으면 영어로 따로 쓰겠다. 처음의 포부를 접은 것은 아쉽지만 말은 어디까지나 수단이다. 나는 작지만 소중한 나의 생각들이 어떻게 자라고 성숙해가는지 이 공간에 차곡차곡 담아가고 싶다.
One excuse for myself... From now on, I am going to write reflections either in Korean or in English. Writing them in both languages takes too much time, let alone my lacking competence in English. I would like to ask for understanding from myself and from possible, if any, future readers of my reflections.
그토록 철저한 호기심과 목적의식을 가지고 번역에 가담한 일본 사회의 풍토가 놀라웠다.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접하는 많은 번역어들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한번 쯤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다.
나는 비록 전문 번역가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 번역을 하게 된다. 매번 최선을 다해서 번역을 해보려 하지만 항상 어휘와 표현 앞에서 고민과 좌절을 하게 된다. 그만큼 번역은 쉽지 않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많은 이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이지도 모른다.
아, 한 가지 나 자신을 위한 변명... 이 블로그에 끄적이면서 되도록 우리 말과 영어 두 언어를 모두 써서 작성해 보려고 했으나, 짧은 영어 실력과 부족한 표현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그러다 보니 흘러가는 물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단상들을 가끔이라도 글로 잡아 놓으려는 내 시도가 너무 버거운 일이 되어 버린다. 이제부터 한글로 쓸 것은 한글로 쓰고, 혹시 영어로 쓸 일이 있으면 영어로 따로 쓰겠다. 처음의 포부를 접은 것은 아쉽지만 말은 어디까지나 수단이다. 나는 작지만 소중한 나의 생각들이 어떻게 자라고 성숙해가는지 이 공간에 차곡차곡 담아가고 싶다.
One excuse for myself... From now on, I am going to write reflections either in Korean or in English. Writing them in both languages takes too much time, let alone my lacking competence in English. I would like to ask for understanding from myself and from possible, if any, future readers of my reflections.
Robert Capa 사진전을 다녀와서
Capa 사진전 팜플렛 |
유럽, 아메리카, 중동, 아시아 등 세계 곳곳을 누빈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진전에 다녀왔다. 전시회 벽을 빼곡히 채운
흑백 사진들… 파리든, 스페인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그의
시선은 대개 무언가 비슷한 것을 향하고 했다. 길에서 노는 천진난만한 아이들, 긴장 속에서 전쟁을 일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서 허탈해 하는 여인들, 전장으로 향하거나 전장에서 싸우는 군인들,
그리고 도시와 시골의 평범한 사람들… 초고속으로 변해가는 작금의 세상에서 비록 100년도 다 지나지 않았어도 이미 동화처럼 먼 옛날이 되어버린 듯한 지난 세기의 빛 바랜 사진들에는, 참혹한 전쟁 속에서 아직도 살아남아 파닥거리는 인간의 생명력이 재 속에 남은 불씨처럼 온기를 간직한 채 숨쉬고
있었다. 그가 찍고자 한 피사체가 바로 ‘사람’과 ‘생명’이었기 때문이리라. 심지어 세 구의 군인 시신을 담은 사진에서도 내게는 사진 속 광경을 지배하는 죽음 자체보다는 오히려 방금 꺼져간
생명이 보였다. 전쟁 때문에 짓밟혀 사라진 바로 그 생명… 카파의
카메라는 바로 그것을 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많은 사진들에서 때로는 정제된, 때로는 뛰쳐나오는 감정의 울림을 보게
된다. 나치에 대항하다 희생당한 젊은 이태리 청년들의 장례식에서 오열하는 어머니들의 사진은 특히나 생생한
슬픔을 절절이 느끼게 하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 옆에는 이들 희생자 중 한 청년의 시신을 담은 관이
운구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 있었는데, 관의 길이보다 청년의 키가 더 큰 탓인지 시신의 발이 관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허름하고 초라해 보이는 죽음과도 같아서 일견 아쉬움과 서글픔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음을 무릅쓴 그들의 용기야말로 관 속에 다 담지 못할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역설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의 사진 속에서 도시나 시골의 평범한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풍경과 사람들의 차림새는 또다른 맛을 지녔다. 오래되고 꾀죄죄한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덮어놓고 무엇이나 세련되고 깔끔한 것만을 추구하는 현대의 도회적 이상과는
달리, 파리나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 거리의 건물이나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시골의 풍광에서, 아직도 풋풋한 인간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진다. 유리와 금속이 아니라 돌과 벽돌로 되어 온기를 지닌 건물들. 인공
섬유로 대량생산된 브랜드 패션이 아니라 한땀한땀 바느질과 재봉틀로 지어냈을 남녀의 의복들. 농부들의 소박한
옷차림과 이국(異國) 사람들의 민속의상까지. 이제는 세련되고 매끈한 현대의 물결에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내주는 과거의 편린이다.
또한 전장에서 찍은 사진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내던지며 찍은 것들도 많았다. 그를
유명하게 한 그 문구처럼 피사체에 한 걸음 더 다가서려는 태도가 물씬 풍긴다. 도대체 어떤 사명감이
그에게 이런 태도를 가져다 준 것일까.
카파의 사진들을 보면서 보게 되는 것은 이중의 시선이다. 어느 사진가의
작품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하나는 피사체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을 향하는 카파의 시선이다. 일상의 평범을 사는 사람들의 시선은 때로는 서로를 향해 있고 때로는 카메라를 향해 있다. 카파는 그들을 자연스레 응시한다.
한편 전시의 공습경보를 듣고 하늘을 올려다 보는 도시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담은 몇몇 사진들에서, 카파의 시선은 하늘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확실성에 떠는 이들 도시민들을 향해 돌진한다.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하늘을 치켜다 볼 때, 카파의 눈길은
자신의 생명을 사리기에 앞서 생명의 가느다란 끈이 행여나 끊어질까 노심초사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공포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전후 파리에서 나치에 부역했던 한 여인이 머리를 삭발 당한 채 조롱을 당하며 거리에서 끌려다니는
사진은 조국을 배반한 한 여인이 겪는 수모가 어디까지 정당한 것인지 묻게 했다. 그 여인은 아마도 독일군과의
사이에서 낳았음직한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카파는 그 사진을 찍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적국에 대한 분노와 해방감에서 이제 죄 지은 여인을 벌레 보듯이 하는 파리 시민들의 편에서 사진을 들이대고
있었을까, 아니면 인간적 나약함과 잘못된 판단으로 죄를 지은 여인의 편에서 담담하게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을까… 이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의 손을 떠난 사진은 이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해석에도 내맡겨진
것이리라. 내게는 이미 무표정해진 얼굴로 아기를 바라보는 죄 지은 여인의 시선이 가슴에 남는다. 여인이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온통 자신을 조롱하고 무시하고 욕하는 날카로운 시선과 맞닥뜨릴 뿐이었으리라.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일을 했다는 자괴감과 더불어 자신을 그 상황으로 몰고 간 자기 삶의 모든 것들에
회한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그 쌀쌀한 시선 앞에서 여인의 얼굴이 무표정해진 것은 당연지사다. 이제 아무 것도 바라볼 곳이 없는 여인의 시선은 자신의 품에 안긴 아기를 향한다. 그 아기는 자신의 죄를 고발하는 존재이자 자신의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생명체이다. 역사와 개인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제는 사랑하는 법마저 잊어버렸을 것 같은 여인.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는 비록 아무런 감동도 동요도 보이지 않지만, 눈에
직접 보이는 시선 너머로 아마도 체념 섞인 후회의 한숨과 더불어 일말의 사랑이 새근새근 온기를 내뿜고 있었으리라.
나는 카파의 카메라가 그 여인의 시선을 담고자 했었기를 바란다. 나만의 착각이어도 상관없지만. 분노에 사로잡힌 파리 시민이나 나치에 부역한 여인, 그 누구도 내가
임의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정의감에서 나온 분노가 또다른 상처를 낳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전 관람을 마치고 시청으로 돌아 나왔다. 서울시청 광장에서는 대통령에
항의하고자 시위 인파가 몰려들고 있었고, 무교동 쪽에서는 항의 시위에 반대하는 시위가 막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서로 맞불을 놓는 시위다… 카파가 지금 서울에 온다면
무슨 사진을 어떻게 찍고자 했을까. 대한문과 서울광장에서 떨리는 그의 손길은 어디를 향해 셔터를 누르고
있었을까. 인류의 광기와 비이성은 더 이상 서정시가 불가능한 시절에도 계속되고 있다.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카파가
셔터를 눌렀다면 그들 중 진실의 편에 선 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흑백 사진 속 생명의 온기처럼 먼 훗날의 세대에게도 남게 되었으리라.
Friday, 16 August 2013
그리스도의 감각 (Sensus Christi)
The Raising of Lazarus - 빈센트 반 고흐 |
어느 신부님께 들은 마더 데레사의 일화...
어느 날 한 신학생이 마더 데레사에게
세상에 대해 마더 데레사만큼 경험이 많지 않은 자신이
세상을 이해하고 아픔을 느낄 수 있는 훌륭한 사목자가 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단다.
마더 데레사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될 수 없지만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의 감각으로 채우면 가능하다고 답변하셨단다.
요즈음 내가 그리스도의 감각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수많은 고통과 아픔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행인지 불행인지 고만고만한 삶의 쳇바퀴를 근근이 살아가는 나...
이렇듯 죄많고 구태의연한 내가
삶의 무게에 짓눌리며 살아가는 많은 분들의 아픔에
참된 연민의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스스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감각을 가질 수만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바라보시고
사람들을 대하시던 그런 마음을 내가 가질 수만 있다면,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그런 마음을 내게 허락해 주신다면...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그분은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뼛속 깊이 느낄 줄 아는 분이셨다.
사도직의 프론티어와 나의 프론티어
예수회원인 우리는 '프론티어(frontier)'로 가라는 소명을 받았다.
말그대로 최전선...
종교 개혁 시기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부딪치는 지점에서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
지적, 영적 사도직에 여념이 없었던 것에서부터,
매 시대 신앙이 세상과 만나는 접점에서
복음을 전파하고자 전인적인 투신을 하는 것이 예수회원의 소명이었다.
며칠 전 아침미사를 앞두고 성당에 앉아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의 프론티어에도 다가서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세상의 프론티어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랬다. 나의 안온한 영역(comfort zone),
곧 내 안의 프론티어를 넘어서지도 못하면서
어찌 신앙과 세상의 프론티어로 나아가겠노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허나 이 상념은 공연한 유혹인지도 모른다.
세상 어느 누가 '완전한 인간'이래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예수회원은 또한 '죄인이면서 부름을 받은 받은 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응당 우리를 부르신 이가
우리의 사도직 안에서의 일도 관장하신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부족함을 겸손되이 바라보되
우리가 하는 일을 진두진휘하시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면 될 뿐이다.
다만 그분이 프론티어로 부르실 때에
자꾸 후방으로 발을 빼려고만 하지 않아야 할 따름이다.
그러는 못난 모습까지도 용서하실 주님이시겠지만...
말그대로 최전선...
종교 개혁 시기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부딪치는 지점에서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
지적, 영적 사도직에 여념이 없었던 것에서부터,
매 시대 신앙이 세상과 만나는 접점에서
복음을 전파하고자 전인적인 투신을 하는 것이 예수회원의 소명이었다.
며칠 전 아침미사를 앞두고 성당에 앉아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의 프론티어에도 다가서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세상의 프론티어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랬다. 나의 안온한 영역(comfort zone),
곧 내 안의 프론티어를 넘어서지도 못하면서
어찌 신앙과 세상의 프론티어로 나아가겠노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허나 이 상념은 공연한 유혹인지도 모른다.
세상 어느 누가 '완전한 인간'이래서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예수회원은 또한 '죄인이면서 부름을 받은 받은 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응당 우리를 부르신 이가
우리의 사도직 안에서의 일도 관장하신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부족함을 겸손되이 바라보되
우리가 하는 일을 진두진휘하시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면 될 뿐이다.
다만 그분이 프론티어로 부르실 때에
자꾸 후방으로 발을 빼려고만 하지 않아야 할 따름이다.
그러는 못난 모습까지도 용서하실 주님이시겠지만...
Saturday, 27 July 2013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것 Raising Awareness
교황님의 행보가 계속해서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번 많은 아프리카 난민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유럽으로 올 때
첫 기착지가 되는 람페두사 섬을 방문하신 데 이어서
이번 세계청년대회를 위해 방문하신 브라질에서는
Varginha라는 빈민촌을 직접 방문하신다고 한다...
Pope Francis's move continues to move people's hearts.
After a visit to Lampedusa island, which is the first stop-over
for many Africans who risk their lives in order to come to Europe for better future,
this time, the Pope, who is visiting Brazil for WYD, is to visit Varginha,
one of many impoverished villiages in the country.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우리 속담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못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관심해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닐 터이다.
더 나아가 가난이 계속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As Jesus said, there have been the poor all the time in human history.
According to a Korean saying, poverty cannot be overcome even by the government.
However, that does not justify our apathy towards the poor neighbours
nor to the root cause of the poverty. We need to constantly think about that.
다만 우리의 생활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항상 바쁘거나
아니면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여러 가지 요소들로 가득하다.
아무리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라도 당장 내 일이거나 가까운 이들이 겪는 일이 아니면
관심을 가지기도 어렵고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기가 십상이다.
It is only that our lives are often filled with busyness
or full of distractions that dissuade us from seeing the world as it is.
Even the important and urgent issues, unless they are our situations
or something those who are close to us are experiencing,
can be slipped out of our minds or cannot get deserved attention.
어쩌면 교황님은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계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분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위치에 계신 만큼,
교황님이 선택하시는 행선지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나 역시도 브라질의 빈민촌을 Favela라고 부른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한 빈민촌이 매우 많다는 점에 대해서
교황님 덕분으로 처음 알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분 덕분으로 우리 신앙인의 의무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는 점이다.
Perhaps, the Pope is doing what he needs to do for the suffering people
as a member of the humanity himself.
But since he is in a position where all the ears and eyes of the world pay attention to,
his move is to attract people's interests necessarily.
For me also, I got to know the fact that Brazilian poor quarters are called 'Favela'
and that there are many such villages in Brazil, thanks to his visit to one of the villages.
More importantly, his visit to the poor and needy reminds me that
our duty as a faithful is to remember and to be with those who are poor and suffering.
일상의 쳇바퀴가 다시금 나의 눈과 귀를 막고 나의 가슴을 차갑게 하기 전에
교황님을 통해 보내시는 하느님의 메세지를 깊이 새겨들어야겠다.
Before my daily routine stops my ears and eyes and cools my hearts again,
I would like to engrave my heart with God's message which is sent through our Holy Father.
아,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시편 95장 7-8절)
O that today you would listen to his voice!
Do not harden your hearts.(Ps 95, 7-8)
Monday, 8 July 2013
프란치스코 교황님- Pope Francis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탈리아의 람페두사 섬을 방문하셨다는 외신을 접했다.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으로 불법 이민을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넘어온다는 이 섬...
그 섬을 로마 밖의 첫 번째 사목 방문지로 선택하신 교황님의 행보에
깊은 메세지가 담겨 있다는 분석이다.
I read from a foreign media that Pope Francis visited an Italian island of Lampedusa.
This is an island where tens of thousands Africans come in risky journeys
in order to enter Europe 'illegally'.
The analysis is that the fact of choosing this island as the first pastoral visit
outside Rome already delivers a deep message of the pontiff.
교황님께서 집전하실 미사의 제대는
불법 이민자들과의 연대를 표현하기 위해
작은 배로 만들어져 있었다.
The altar where the Pope would say an open-air Mass
was a small boat to express the solidarity with the illegal migrants.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교황님의 행보는 내 자신의 삶과 그 방향성을 점검하게 하신다.
진정 이 시대가 교회의 쇄신과 인류의 반성을 위해
교황님의 거침없는 복음 선포가 계속 되기를 기도한다.
The option for the poor...
Pope's actions make me reflect on my life and its directions.
I sincerely pray that his outright proclamation of Gospel
keep going on for the renewal of the Church and the repentance of the humanity.
Saturday, 6 July 2013
SNS 단상 - Reflections on SNS
요즘 유행하는 소셜미디어를 나는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다.
게을러서이기도 하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써서 나누는 것이 부자연스럽기도 하고
범람하는 정보의 양을 읽고 소화하고 또 내 것을 생산해내는 그 모든 과정이 벅차기도 한 까닭이다.
오래간만에 어느 소셜미디어 싸이트를 방문했다.
너무나 많은 좋은 글들과 사진들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심오한 메세지들에서 받는 신선한 배움도 있었다.
마치 나 자신은 그동안 별다른 생각도 일도 없이 보내온 것 같은 자괴감...
허나 앗서라...
지인들과 네티즌들이 올리는 좋은 콘텐츠들로부터 배우고 성장하는 것은 좋지만
그 많은 데이터들 앞에서 내 소박한 생활을 비교하거나 탓하지 말자.
내 삶 안에서 나는 나대로의 성장과 배움의 기회를 수없이 받아 왔다...
게을러서이기도 하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써서 나누는 것이 부자연스럽기도 하고
범람하는 정보의 양을 읽고 소화하고 또 내 것을 생산해내는 그 모든 과정이 벅차기도 한 까닭이다.
오래간만에 어느 소셜미디어 싸이트를 방문했다.
너무나 많은 좋은 글들과 사진들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심오한 메세지들에서 받는 신선한 배움도 있었다.
마치 나 자신은 그동안 별다른 생각도 일도 없이 보내온 것 같은 자괴감...
허나 앗서라...
지인들과 네티즌들이 올리는 좋은 콘텐츠들로부터 배우고 성장하는 것은 좋지만
그 많은 데이터들 앞에서 내 소박한 생활을 비교하거나 탓하지 말자.
내 삶 안에서 나는 나대로의 성장과 배움의 기회를 수없이 받아 왔다...
실망하지 않는 법 Not to be disappointed
사람에게 실망할 때가 있다.
그런데 대개 그것은 내 눈으로 내 일만 바라볼 때 그러하다.
There are times when I get disappointed at others.
It is usually when I only see 'my' situations with 'my' viewpoints.
실망하지 않으려면
이해하려는 마음과 더 넓게 보려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혹여 내 행동과 마음가짐은 어떠한지 마음을 여며야 한다.
In order not to be disappointed,
the hearts that try to understand and the attitudes that try to look broader are needed.
And I also need to examine my own actions and attitudes.
그리고 섭섭한 마음은 흐르는 물에
감사한 마음은 돌에 새기라는 말씀을 기억하련다.
I remind myself of the saying that
we should write about what we felt sorry on the flowing water
and write about what we felt grateful on the rock.
그런데 대개 그것은 내 눈으로 내 일만 바라볼 때 그러하다.
There are times when I get disappointed at others.
It is usually when I only see 'my' situations with 'my' viewpoints.
실망하지 않으려면
이해하려는 마음과 더 넓게 보려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혹여 내 행동과 마음가짐은 어떠한지 마음을 여며야 한다.
In order not to be disappointed,
the hearts that try to understand and the attitudes that try to look broader are needed.
And I also need to examine my own actions and attitudes.
그리고 섭섭한 마음은 흐르는 물에
감사한 마음은 돌에 새기라는 말씀을 기억하련다.
I remind myself of the saying that
we should write about what we felt sorry on the flowing water
and write about what we felt grateful on the rock.
Thursday, 27 June 2013
길 위에서
이창재 감독의 '길 위에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백흥암'에서 수행하시는 비구니 스님들의 한해살이를 담은 영화였다.
영화는 몇몇 비구니 스님들을 한 사람씩 비추어가며
그분들이 구도의 길에 들어서게 된 사연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나이도 다르고, 절에 들어오게 된 까닭도 다 다르지만,
그들의 삶은 누구보다도 치열해 보였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에 비춰진 불가의 법도는 사뭇 엄격해 보였다.
행자스님들이 계를 받기 위해 참석한 교육장에서,
묵언해야 하는데 떠들거라면 차라리 명찰을 떼고 떠들라는,
다시 말해서 그냥 나가라는 진행자 스님의 호통...
절간에도 삶이 있고 현실이 있으니 낭만적인 감상으로 출가하지 말고
좌초함 없는 꿋꿋한 구도의 길을 가라는 충고...
자신을 버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가르침...
그리고 '성불하십시오'라는 인사말...
영운 스님은 영화 후반부에서
구도자는 밥값을 해야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스님들이 90일 수행을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남이 해주는 밥을 얻어 먹고 있는 것이니,
수행에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그 밥값은 얼마나 무거운 것이 될 거냐는 말씀이셨다.
또한 깨달음에 정진하는 그 모습을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계셨다.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행을 한다고 앉아 있되 화두를 앞에 두고서 생각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화두를 진정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가지고 내려가
씨름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었다.
'구도의 길'이라는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가톨릭과는 사뭇 다른 불교의 세계관 안에서
말씀하시고 나누시는 스님들을 지켜 보면서
문득 이분들을 구도의 길로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궁금해졌다.
민재 행자는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절에 왔다고 한다.
그전에 종교생활과 무관하게 지내던 중 인터넷을 검색하며
구도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단다.
그런데 교회나 성당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믿는 것이지만
절은 자신을 믿는 것이에게 절에서 수행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어느 구도자나 '자신을 찾고 싶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렷다.
그러나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가톨릭 신앙 안에서 하느님은 은총을 퍼다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밥값을 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기에
오늘도 나는 밥값도 못한다는 자책감을 느끼며,
아니 때로는 그 자책감을 느낄 염치도 없이,
한 끼 두 끼 남들이 베풀어 주시는 밥을 먹는다.
그리고 가톨릭의 수행은 '깨달음' 자체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에 달려 있다.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형제처럼, 자매처럼, 연인처럼, 친구처럼,
그 모든 인간적 사랑의 이상을 합친 것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나의 욕망도 버리고, 나 자신도 버리고, 더 나아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조바심마저 버리는 구도의 길...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나 자신이 그처럼 살아가지 못해서 죄송하기는 하지만,
수많은 가톨릭 수행자들이 현세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지극히 불편하고 힘든 길을 애써서 걸어가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을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사랑마저도 바라보지 않는
불교 수행자들의 고행은 어디에서 그 힘을 얻는 것일까.
그 적막하고 아득한 구도의 길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는 것일까.
또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불편함과 고됨을 다 견디어 내는 것은
깨달음을 얻고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까???
나의 신앙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주제에,
불교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특히 불교 수행자들이 지향하는 곳과
그분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하는 물음들이 올라온다.
그러나 그 차이점과 궁금함을 넘어서서,
영운 스님이 말씀하시는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된다'는 말씀이
가톨릭 신앙 안에서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는 경지와 비슷한 무엇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의 모든 열망, 번뇌, 바램, 아픔 속에 함께 하고 계시는 하느님...
내 존재가 짊어진 십자가를 내 몸처럼 하나로 껴안을 때,
바로 그 때가 하느님과 내가 일치를 이루는 순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화두를 두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불교의 수행자들은
화두와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씨름하는 그 진정한 기도의 순간이
곧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문턱이라고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안팎에서 몰려 오는 수많은 질문들...
하지만 화면은 그처럼 간단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게만 매달려 있지 않았다.
마루에서 바라보는 한 여름의 거센 빗줄기,
불이 붙은 듯인 붉게 타오르는 단풍 나무 잎새들,
수북히 쌓은 눈을 삽으로 밀고 비로 쓰는 스님들,
칠흑같은 어둠과 먼동으로 비추어 오는 빛이 교차하는 사찰의 기와처마,
법당에서 엄숙하면서도 단아하게 드리는 아침 예불,
목탁 두드리는 법을 설명해 주시는 선배 스님,
불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김장을 하시는 스님들,
생일 케이크와 축하 노래를 부르는 모습,
만행길에 오르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담소를 나누고, 윷놀이를 하고,
부엌일을 하고, 청소를 하는 일상의 정경...
모자이크처럼 점점이 절간의 삶을 이루는 하나 하나의 장면들이
한국 고유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과 자연을 보여준다.
2천년이 넘는 세월을 한국인들의 정신세계 속에 자리잡아 온
불교의 면모가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런 종교심이 이미 우리에게 있었기에
외래 종교인 가톨릭의 수도생활도
우리에게 더 쉽게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영화 속에서 비구니 스님들 개개인의 사연과 아픔이
간간이 그분들의 말과 눈물 방울로 전달되기는 하였으나,
내가 더 궁금했던 것은 공동체 생활에서
오기 마련인 보다 현실적인 어려움들이었다.
아쉽게도 그 부분은 크게 부각되어 다뤄지지 않았다.
아마도 촬영을 위해 함께 머물면서도 여전히 외부인일 수밖에 없었기에
깊이 들어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감독의 관심사는 어떤 동기와 사연으로 절에 오게 되었나에
더 깊이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몇 해 전 유럽의 어느 봉쇄 수도원의 삶을 닮은 '대침묵'이라는 작품이
그곳 젊은이들 사이에서 잔잔한 열풍을 일으켰다고도 하고,
또 신학교의 일상을 담은 우리 나라 방송사의 다큐멘터리가
가톨릭 종교인에 대한 신선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이 다큐멘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면서도
세상의 길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과 호기심을 주는
여성 불교수행자들의 모습을 담음으로써
경쟁과 물질만능주의에 찌든 현대인들의 또다른 갈망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단순히 그런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또 하나의 눈요기거리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자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각자의 치열함으로 절간을 지키는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네 삶의 현실이 곧 구도의 길이어야 함을
가슴 속 깊은 울림으로 깨닫게 해주는 영화로 남았으면 좋겠다.
공동체로 돌아오는 길, 마음 속에 남는 영화의 잔상들...
지하철과 버스에서, 평소에 하듯이 가방에 든 책을 꺼내어 손에 드는 대신
앉아 있는 이들, 서 있는 이들, 그리고 걷고 있는 이들을
좀 더 유심히 바라본다.
'백흥암'에서 수행하시는 비구니 스님들의 한해살이를 담은 영화였다.
영화는 몇몇 비구니 스님들을 한 사람씩 비추어가며
그분들이 구도의 길에 들어서게 된 사연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나이도 다르고, 절에 들어오게 된 까닭도 다 다르지만,
그들의 삶은 누구보다도 치열해 보였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에 비춰진 불가의 법도는 사뭇 엄격해 보였다.
행자스님들이 계를 받기 위해 참석한 교육장에서,
묵언해야 하는데 떠들거라면 차라리 명찰을 떼고 떠들라는,
다시 말해서 그냥 나가라는 진행자 스님의 호통...
절간에도 삶이 있고 현실이 있으니 낭만적인 감상으로 출가하지 말고
좌초함 없는 꿋꿋한 구도의 길을 가라는 충고...
자신을 버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가르침...
그리고 '성불하십시오'라는 인사말...
영운 스님은 영화 후반부에서
구도자는 밥값을 해야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스님들이 90일 수행을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남이 해주는 밥을 얻어 먹고 있는 것이니,
수행에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그 밥값은 얼마나 무거운 것이 될 거냐는 말씀이셨다.
또한 깨달음에 정진하는 그 모습을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계셨다.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행을 한다고 앉아 있되 화두를 앞에 두고서 생각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화두를 진정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가지고 내려가
씨름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었다.
'구도의 길'이라는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가톨릭과는 사뭇 다른 불교의 세계관 안에서
말씀하시고 나누시는 스님들을 지켜 보면서
문득 이분들을 구도의 길로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궁금해졌다.
민재 행자는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절에 왔다고 한다.
그전에 종교생활과 무관하게 지내던 중 인터넷을 검색하며
구도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단다.
그런데 교회나 성당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믿는 것이지만
절은 자신을 믿는 것이에게 절에서 수행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어느 구도자나 '자신을 찾고 싶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렷다.
그러나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가톨릭 신앙 안에서 하느님은 은총을 퍼다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밥값을 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기에
오늘도 나는 밥값도 못한다는 자책감을 느끼며,
아니 때로는 그 자책감을 느낄 염치도 없이,
한 끼 두 끼 남들이 베풀어 주시는 밥을 먹는다.
그리고 가톨릭의 수행은 '깨달음' 자체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에 달려 있다.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형제처럼, 자매처럼, 연인처럼, 친구처럼,
그 모든 인간적 사랑의 이상을 합친 것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나의 욕망도 버리고, 나 자신도 버리고, 더 나아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조바심마저 버리는 구도의 길...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나 자신이 그처럼 살아가지 못해서 죄송하기는 하지만,
수많은 가톨릭 수행자들이 현세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지극히 불편하고 힘든 길을 애써서 걸어가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을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사랑마저도 바라보지 않는
불교 수행자들의 고행은 어디에서 그 힘을 얻는 것일까.
그 적막하고 아득한 구도의 길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는 것일까.
또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불편함과 고됨을 다 견디어 내는 것은
깨달음을 얻고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까???
나의 신앙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주제에,
불교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특히 불교 수행자들이 지향하는 곳과
그분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하는 물음들이 올라온다.
그러나 그 차이점과 궁금함을 넘어서서,
영운 스님이 말씀하시는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된다'는 말씀이
가톨릭 신앙 안에서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는 경지와 비슷한 무엇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의 모든 열망, 번뇌, 바램, 아픔 속에 함께 하고 계시는 하느님...
내 존재가 짊어진 십자가를 내 몸처럼 하나로 껴안을 때,
바로 그 때가 하느님과 내가 일치를 이루는 순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화두를 두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불교의 수행자들은
화두와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씨름하는 그 진정한 기도의 순간이
곧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문턱이라고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안팎에서 몰려 오는 수많은 질문들...
하지만 화면은 그처럼 간단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게만 매달려 있지 않았다.
마루에서 바라보는 한 여름의 거센 빗줄기,
불이 붙은 듯인 붉게 타오르는 단풍 나무 잎새들,
수북히 쌓은 눈을 삽으로 밀고 비로 쓰는 스님들,
칠흑같은 어둠과 먼동으로 비추어 오는 빛이 교차하는 사찰의 기와처마,
법당에서 엄숙하면서도 단아하게 드리는 아침 예불,
목탁 두드리는 법을 설명해 주시는 선배 스님,
불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김장을 하시는 스님들,
생일 케이크와 축하 노래를 부르는 모습,
만행길에 오르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담소를 나누고, 윷놀이를 하고,
부엌일을 하고, 청소를 하는 일상의 정경...
모자이크처럼 점점이 절간의 삶을 이루는 하나 하나의 장면들이
한국 고유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과 자연을 보여준다.
2천년이 넘는 세월을 한국인들의 정신세계 속에 자리잡아 온
불교의 면모가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런 종교심이 이미 우리에게 있었기에
외래 종교인 가톨릭의 수도생활도
우리에게 더 쉽게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영화 속에서 비구니 스님들 개개인의 사연과 아픔이
간간이 그분들의 말과 눈물 방울로 전달되기는 하였으나,
내가 더 궁금했던 것은 공동체 생활에서
오기 마련인 보다 현실적인 어려움들이었다.
아쉽게도 그 부분은 크게 부각되어 다뤄지지 않았다.
아마도 촬영을 위해 함께 머물면서도 여전히 외부인일 수밖에 없었기에
깊이 들어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감독의 관심사는 어떤 동기와 사연으로 절에 오게 되었나에
더 깊이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몇 해 전 유럽의 어느 봉쇄 수도원의 삶을 닮은 '대침묵'이라는 작품이
그곳 젊은이들 사이에서 잔잔한 열풍을 일으켰다고도 하고,
또 신학교의 일상을 담은 우리 나라 방송사의 다큐멘터리가
가톨릭 종교인에 대한 신선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이 다큐멘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면서도
세상의 길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과 호기심을 주는
여성 불교수행자들의 모습을 담음으로써
경쟁과 물질만능주의에 찌든 현대인들의 또다른 갈망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단순히 그런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또 하나의 눈요기거리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자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각자의 치열함으로 절간을 지키는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네 삶의 현실이 곧 구도의 길이어야 함을
가슴 속 깊은 울림으로 깨닫게 해주는 영화로 남았으면 좋겠다.
공동체로 돌아오는 길, 마음 속에 남는 영화의 잔상들...
지하철과 버스에서, 평소에 하듯이 가방에 든 책을 꺼내어 손에 드는 대신
앉아 있는 이들, 서 있는 이들, 그리고 걷고 있는 이들을
좀 더 유심히 바라본다.
Tuesday, 9 April 2013
수도회와 NGO - Jesuits and NGO
아태 지역구 개발회의 참석차 한국에 오신
콜롬비아 출신 Jorge Eduardo Serrano-Ordonez 신부님을 잠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I had a chance to meet Fr Jorge Eduardo Serrano-Ordonez SJ
who were visiting Korea for development meeting for AP assistancy.
그분께 'development'의 의미에 대해서 여쭈었는데,
그분의 말씀을 자구대로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미국에서 사용하는 의미는 단순하게 무엇을 짓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를 형성하고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셨던 것 같다.
I asked him about the meaning of the word 'development'.
I cannot remember what he said word by word,
but as far as I can recall, he said that especially in the meaning
that is usually understood in the U.S.
'development' means to build a relationship and share with others
instead of just constructing buildings.
한편 예수회원으로서 사회 사도직을 하는 것과
일반 사회의 NGO 활동이 어떤 차이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여쭈었는데,
수도자로서 하는 활동은 결국 하느님 왕국을 건설하는 데에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NGO 활동과 차이를 지닐 수 있다고 하셨다.
즉 상대방이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도움을 받고 자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상대방의 삶에 복음적 가치가 자리잡을 수 있게 하는 것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활동 목표라는 말씀이시다...
I also asked him about the differences between social apostolate of Jesuits
and the civil NGO works.
He says that the aim of activities by the religious is in the end
to build the Kingdom of God and that can be a difference between those two.
That is, we are not satisfied with meeting beneficiaries material needs,
but we want to go further where we can help them live in an environment
in which Gospel values are alive.
콜롬비아 출신 Jorge Eduardo Serrano-Ordonez 신부님을 잠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I had a chance to meet Fr Jorge Eduardo Serrano-Ordonez SJ
who were visiting Korea for development meeting for AP assistancy.
그분께 'development'의 의미에 대해서 여쭈었는데,
그분의 말씀을 자구대로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미국에서 사용하는 의미는 단순하게 무엇을 짓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를 형성하고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셨던 것 같다.
I asked him about the meaning of the word 'development'.
I cannot remember what he said word by word,
but as far as I can recall, he said that especially in the meaning
that is usually understood in the U.S.
'development' means to build a relationship and share with others
instead of just constructing buildings.
한편 예수회원으로서 사회 사도직을 하는 것과
일반 사회의 NGO 활동이 어떤 차이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여쭈었는데,
수도자로서 하는 활동은 결국 하느님 왕국을 건설하는 데에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NGO 활동과 차이를 지닐 수 있다고 하셨다.
즉 상대방이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도움을 받고 자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상대방의 삶에 복음적 가치가 자리잡을 수 있게 하는 것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활동 목표라는 말씀이시다...
I also asked him about the differences between social apostolate of Jesuits
and the civil NGO works.
He says that the aim of activities by the religious is in the end
to build the Kingdom of God and that can be a difference between those two.
That is, we are not satisfied with meeting beneficiaries material needs,
but we want to go further where we can help them live in an environment
in which Gospel values are alive.
궁금한가? - Do you have questions to your loved ones?
지난 주 청년토크에서는 서울대교구 최용진 신부님께서
청원기도에 대한 강연을 해 주셨다.
신부님 강연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지만
많은 사람들이 더이상 물음표를 던지지 않고 느낌표를 찍는다는 것...
상대방에 대해 궁금해하고 그 사람의 생각과 바램을 헤아려 보려고 하기보다는
이미 생긴 선입견에 의한 답을 내리고 단정을 짓는다는 것...
Last week in 'Young people's talk',
Fr Choi Yong-Jin from Seoul Arch Diocese held a talk about petition prayers.
He says we put up a question mark to those we love
but after a while many of us put up a exclamation mark instead of question marks.
That means we are not interested to know about others anymore
and we just make judgement towards others based on our prejudice.
Asking questions means we are interested in them and we want to know about them.
기도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에 대해 얼마나 궁금해하고 있는가
물어보라고 말씀을 하셨다...
He asked us how much we are interested in God... whether we ask questions to Him
about how He feels and thinks...
Monday, 1 April 2013
빈 무덤(요한 복음 20,11-18) - The empty Tomb(Jn 20,11-18)
Meanwhile Mary stayed outside near the tomb, weeping.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
Mary of Magdala was weeping in front of the empty tomb and she was there because she loved Jesus so much. Jesus died on the cross and was no more with her. There remained no more hope and joy, but her love for Jesus made her stay near the tomb and face her own sorrow and dejection.
매년 찾아오는 부활이 지났다. 그런데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까. 아직도 빈 무덤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aster has come as usual in this time of the year. But did I meet the resurrected Jesus? Am I not still just looking at the empty tomb?
마리아가 자신의 어두움, 즉 빈 무덤을 지키고 섰을 때, 그녀는 울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다 she stooped to look inside (Jn 20,11)'.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주는 천사들을 보았다. 어쩌면 나는 빈 무덤 앞에 서서 울고 떼를 쓰기는 할지언정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기를 회피하는지도 모른다. 자꾸만 다른 일에 몰두하고 다른 일에 관심을 쏟으면서 애써 나의 어두움을 제껴 두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언젠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드럽게 나를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When Mary was keeping vigil near at her darkness, or the empty tomb, she was not just weeping but she 'stooped to look inside (Jn 20,11)'. And she saw the angels who heralded her Jesus' resurrection. Perhaps, I may be standing in front of the empty tomb, weeping and nagging. But I may not be trying to look inside the tomb. I may be distracting myself by doing and indulging in other things. Even so, would I hear the voice of Jesus some day calling me gently?
부활의 체험은 스스로 노력해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빈 무덤 곁을 지키고 서는 것, 그리고 그 안을 부단히 들여다 보는 것은 나의 몫이다. 직접 오셔서 나를 부르시고 부활의 따스함으로 내 삶을 채워주시는 것, 그것은 그분의 몫이요, 그분이 주시는 선물일 따름이다.
Easter experience must not be something you gain with efforts. The only thing you have to do is to keep vigil and to look into your own empty tomb out of love for Jesus. It is His choice and His gift that He Himself comes and calls me filling my life with the warmth of resurrection.
양곤의 추억 - Memories from Yangon
내가 일하던 Campion Institute의 farewell party 중에... Director Fr Toto와 예수회 동료 Br Xavier |
2년 동안 실습을 한 미얀마 양곤...
지난 달, 실습을 마무리하면서 많은 이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한 분 한 분 감사한 분들...
2 years regency in Yangon, Myanmar...
Last month, I had to say lots of good-byes.
I thank each one of them...
무엇보다도 귀국하기 전 얼마 동안이나마
미얀마의 다른 곳들을 다니며
보다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은
분에 넘치는 선물이었다.
Just before I returned to Korea,
I had an opportunity to visit other parts of Myanmar
so that I could see, hear, and reflect on different things.
It was a gift more than I deserve.
이제 귀국한 지도 1주일이 넘다 보니
양곤의 추억도 저멀리 사라져 가는 것만 같다.
여기에서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도 자꾸 생기고
너무도 편리하고 세련된 한국 도시의 생활에
다시금 익숙해지고 말았다.
Now that more than a week passed by since my arrival in my home country.
And the memories in Yangon seem to gradually fade away.
I see things I have to do and things I would like to do in my daily life.
And I am accustomed to such a convenient and sophisticated urban life in Korea.
2년 전 실습을 떠날 때,
나는 가난과 사랑의 체험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가끔 문화와 언어의 장벽,
그리고 내 칠칠치 못함으로 좌절이 밀려올 때,
나는 내가 가진 보잘 것 없음의 가난함과,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내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곤 했다.
'가난'과 '사랑'의 체험이기는 한데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체험이라고
하느님을 원망했던 것이다.
When I was leaving for regency 2 years ago,
I wanted to have an experience of poverty and love.
However, whenever the waves of discouragement and frustration overwhelmed me,
I used to witness with regret the poverty of my lowliness,
and the situation I was at where I had to learn to give love instead of being loved.
It was an experience of 'poverty' and 'love'
but in an opposite way than I expected, I grumbled to God.
하지만 실습기를 마치고
지인들과 작별하고 그곳에서의 추억을 접어두고
서울에 돌아와 이 글을 쓰는 지금...
난 정말 내가 바라던 방식으로
'가난'과 '사랑'을 체험하고 왔던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But now after I finished my regency,
after having said many farewells to my friends,
after tucking away memories there into the drawers of my mind,
I am writing this in Seoul...
And I come to think that I experienced 'poverty' and 'love'
in a way exactly that I expected.
물론 내 자신의 가난함도 보았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할 줄 알아야 함도 배웠다.
하지만 나는 하느님 앞에서 나와 이웃의 가난함 안에서도
우러나오는 부유함도 보았고,
그리고 내 주변의 형제자매들로부터 많은 사랑도 받았던 것이다.
Of course I saw the poverty of my lowliness
and I learned the need to love before waiting to be loved.
But I also saw richness of God that comes out of poverty in me and my neighbours.
And I was 'loved' by my fellow brothers and sisters.
이 소중한 기억들을 잊지 말자.
그리고 삶에서 가끔 축 쳐질 때는 다시 되새기자.
내 가난함 안에서 주님의 풍요로움을 보고
내가 사랑함에서 다른 사람에게 이미 사랑받고 있었음을 깨닫자.
그리고 포기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나아가자!
Let's not forget these precious memories.
Remind me of these memories whenever I feel down.
Remember that I saw His richness in poverty
and that I could realise I was being loved when I first loved others.
And let me not give up but step forward in our Lord!
Sunday, 31 March 2013
희망과 용기의 강론 - A homily of hope and courage
인터넷에서 새로 선출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부활 성야 미사 강론을 읽었다.
그 분은 낯섬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열 수 있기를,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의탁할 수 있기를, 요청하셨다.
그리고 그 힘은 그 분의 언행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되돌아보는 데에서 나온다고 하셨다.
I read Easter Vigil homily by newly-elected Pope Francis on the Internet.
He asked we open our hearts to Jesus' invitation to Newness,
that we depend on Him without giving up.
He also pointed out that the strength to do that
would come from remembering His words and deeds.
1주일 여전 양곤에서 귀국한 이후,
다시금 일상 패턴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하는 나에게
왠지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시다.
I came back to Korea from Myanmar about a week ago,
and I find myself to be dragged into the swamp of my usual daily patterns.
Our pope's homily gave me hope and courage.
그 분은 낯섬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열 수 있기를,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의탁할 수 있기를, 요청하셨다.
그리고 그 힘은 그 분의 언행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되돌아보는 데에서 나온다고 하셨다.
I read Easter Vigil homily by newly-elected Pope Francis on the Internet.
He asked we open our hearts to Jesus' invitation to Newness,
that we depend on Him without giving up.
He also pointed out that the strength to do that
would come from remembering His words and deeds.
1주일 여전 양곤에서 귀국한 이후,
다시금 일상 패턴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하는 나에게
왠지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시다.
I came back to Korea from Myanmar about a week ago,
and I find myself to be dragged into the swamp of my usual daily patterns.
Our pope's homily gave me hope and cou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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