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재 감독의 '길 위에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백흥암'에서 수행하시는 비구니 스님들의 한해살이를 담은 영화였다.
영화는 몇몇 비구니 스님들을 한 사람씩 비추어가며
그분들이 구도의 길에 들어서게 된 사연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나이도 다르고, 절에 들어오게 된 까닭도 다 다르지만,
그들의 삶은 누구보다도 치열해 보였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에 비춰진 불가의 법도는 사뭇 엄격해 보였다.
행자스님들이 계를 받기 위해 참석한 교육장에서,
묵언해야 하는데 떠들거라면 차라리 명찰을 떼고 떠들라는,
다시 말해서 그냥 나가라는 진행자 스님의 호통...
절간에도 삶이 있고 현실이 있으니 낭만적인 감상으로 출가하지 말고
좌초함 없는 꿋꿋한 구도의 길을 가라는 충고...
자신을 버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가르침...
그리고 '성불하십시오'라는 인사말...
영운 스님은 영화 후반부에서
구도자는 밥값을 해야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스님들이 90일 수행을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남이 해주는 밥을 얻어 먹고 있는 것이니,
수행에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그 밥값은 얼마나 무거운 것이 될 거냐는 말씀이셨다.
또한 깨달음에 정진하는 그 모습을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계셨다.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행을 한다고 앉아 있되 화두를 앞에 두고서 생각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화두를 진정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가지고 내려가
씨름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었다.
'구도의 길'이라는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가톨릭과는 사뭇 다른 불교의 세계관 안에서
말씀하시고 나누시는 스님들을 지켜 보면서
문득 이분들을 구도의 길로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궁금해졌다.
민재 행자는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절에 왔다고 한다.
그전에 종교생활과 무관하게 지내던 중 인터넷을 검색하며
구도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단다.
그런데 교회나 성당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믿는 것이지만
절은 자신을 믿는 것이에게 절에서 수행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어느 구도자나 '자신을 찾고 싶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렷다.
그러나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가톨릭 신앙 안에서 하느님은 은총을 퍼다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밥값을 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기에
오늘도 나는 밥값도 못한다는 자책감을 느끼며,
아니 때로는 그 자책감을 느낄 염치도 없이,
한 끼 두 끼 남들이 베풀어 주시는 밥을 먹는다.
그리고 가톨릭의 수행은 '깨달음' 자체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에 달려 있다.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형제처럼, 자매처럼, 연인처럼, 친구처럼,
그 모든 인간적 사랑의 이상을 합친 것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나의 욕망도 버리고, 나 자신도 버리고, 더 나아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조바심마저 버리는 구도의 길...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나 자신이 그처럼 살아가지 못해서 죄송하기는 하지만,
수많은 가톨릭 수행자들이 현세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지극히 불편하고 힘든 길을 애써서 걸어가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을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사랑마저도 바라보지 않는
불교 수행자들의 고행은 어디에서 그 힘을 얻는 것일까.
그 적막하고 아득한 구도의 길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는 것일까.
또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불편함과 고됨을 다 견디어 내는 것은
깨달음을 얻고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까???
나의 신앙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주제에,
불교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특히 불교 수행자들이 지향하는 곳과
그분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하는 물음들이 올라온다.
그러나 그 차이점과 궁금함을 넘어서서,
영운 스님이 말씀하시는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된다'는 말씀이
가톨릭 신앙 안에서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는 경지와 비슷한 무엇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의 모든 열망, 번뇌, 바램, 아픔 속에 함께 하고 계시는 하느님...
내 존재가 짊어진 십자가를 내 몸처럼 하나로 껴안을 때,
바로 그 때가 하느님과 내가 일치를 이루는 순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화두를 두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불교의 수행자들은
화두와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씨름하는 그 진정한 기도의 순간이
곧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문턱이라고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안팎에서 몰려 오는 수많은 질문들...
하지만 화면은 그처럼 간단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게만 매달려 있지 않았다.
마루에서 바라보는 한 여름의 거센 빗줄기,
불이 붙은 듯인 붉게 타오르는 단풍 나무 잎새들,
수북히 쌓은 눈을 삽으로 밀고 비로 쓰는 스님들,
칠흑같은 어둠과 먼동으로 비추어 오는 빛이 교차하는 사찰의 기와처마,
법당에서 엄숙하면서도 단아하게 드리는 아침 예불,
목탁 두드리는 법을 설명해 주시는 선배 스님,
불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김장을 하시는 스님들,
생일 케이크와 축하 노래를 부르는 모습,
만행길에 오르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담소를 나누고, 윷놀이를 하고,
부엌일을 하고, 청소를 하는 일상의 정경...
모자이크처럼 점점이 절간의 삶을 이루는 하나 하나의 장면들이
한국 고유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과 자연을 보여준다.
2천년이 넘는 세월을 한국인들의 정신세계 속에 자리잡아 온
불교의 면모가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런 종교심이 이미 우리에게 있었기에
외래 종교인 가톨릭의 수도생활도
우리에게 더 쉽게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영화 속에서 비구니 스님들 개개인의 사연과 아픔이
간간이 그분들의 말과 눈물 방울로 전달되기는 하였으나,
내가 더 궁금했던 것은 공동체 생활에서
오기 마련인 보다 현실적인 어려움들이었다.
아쉽게도 그 부분은 크게 부각되어 다뤄지지 않았다.
아마도 촬영을 위해 함께 머물면서도 여전히 외부인일 수밖에 없었기에
깊이 들어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감독의 관심사는 어떤 동기와 사연으로 절에 오게 되었나에
더 깊이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몇 해 전 유럽의 어느 봉쇄 수도원의 삶을 닮은 '대침묵'이라는 작품이
그곳 젊은이들 사이에서 잔잔한 열풍을 일으켰다고도 하고,
또 신학교의 일상을 담은 우리 나라 방송사의 다큐멘터리가
가톨릭 종교인에 대한 신선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이 다큐멘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면서도
세상의 길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과 호기심을 주는
여성 불교수행자들의 모습을 담음으로써
경쟁과 물질만능주의에 찌든 현대인들의 또다른 갈망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단순히 그런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또 하나의 눈요기거리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자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각자의 치열함으로 절간을 지키는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네 삶의 현실이 곧 구도의 길이어야 함을
가슴 속 깊은 울림으로 깨닫게 해주는 영화로 남았으면 좋겠다.
공동체로 돌아오는 길, 마음 속에 남는 영화의 잔상들...
지하철과 버스에서, 평소에 하듯이 가방에 든 책을 꺼내어 손에 드는 대신
앉아 있는 이들, 서 있는 이들, 그리고 걷고 있는 이들을
좀 더 유심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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