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21 August 2013

Robert Capa 사진전을 다녀와서

Capa 사진전 팜플렛


















유럽, 아메리카, 중동, 아시아 등 세계 곳곳을 누빈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진전에 다녀왔다. 전시회 벽을 빼곡히 채운 흑백 사진들파리든, 스페인이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그의 시선은 대개 무언가 비슷한 것을 향하고 했다. 길에서 노는 천진난만한 아이들, 긴장 속에서 전쟁을 일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서 허탈해 하는 여인들, 전장으로 향하거나 전장에서 싸우는 군인들, 그리고 도시와 시골의 평범한 사람들초고속으로 변해가는 작금의 세상에서 비록 100년도 다 지나지 않았어도 이미 동화처럼 먼 옛날이 되어버린 듯한 지난 세기의 빛 바랜 사진들에는, 참혹한 전쟁 속에서 아직도 살아남아 파닥거리는 인간의 생명력이 재 속에 남은 불씨처럼 온기를 간직한 채 숨쉬고 있었다. 그가 찍고자 한 피사체가 바로 사람생명이었기 때문이리라. 심지어 세 구의 군인 시신을 담은 사진에서도 내게는 사진 속 광경을 지배하는 죽음 자체보다는 오히려 방금 꺼져간 생명이 보였다. 전쟁 때문에 짓밟혀 사라진 바로 그 생명카파의 카메라는 바로 그것을 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많은 사진들에서 때로는 정제된, 때로는 뛰쳐나오는 감정의 울림을 보게 된다. 나치에 대항하다 희생당한 젊은 이태리 청년들의 장례식에서 오열하는 어머니들의 사진은 특히나 생생한 슬픔을 절절이 느끼게 하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 옆에는 이들 희생자 중 한 청년의 시신을 담은 관이 운구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 있었는데, 관의 길이보다 청년의 키가 더 큰 탓인지 시신의 발이 관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허름하고 초라해 보이는 죽음과도 같아서 일견 아쉬움과 서글픔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음을 무릅쓴 그들의 용기야말로 관 속에 다 담지 못할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역설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의 사진 속에서 도시나 시골의 평범한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풍경과 사람들의 차림새는 또다른 맛을 지녔다. 오래되고 꾀죄죄한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덮어놓고 무엇이나 세련되고 깔끔한 것만을 추구하는 현대의 도회적 이상과는 달리, 파리나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 거리의 건물이나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시골의 풍광에서, 아직도 풋풋한 인간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진다. 유리와 금속이 아니라 돌과 벽돌로 되어 온기를 지닌 건물들. 인공 섬유로 대량생산된 브랜드 패션이 아니라 한땀한땀 바느질과 재봉틀로 지어냈을 남녀의 의복들. 농부들의 소박한 옷차림과 이국(異國) 사람들의 민속의상까지. 이제는 세련되고 매끈한 현대의 물결에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내주는 과거의 편린이다.
또한 전장에서 찍은 사진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내던지며 찍은 것들도 많았다. 그를 유명하게 한 그 문구처럼 피사체에 한 걸음 더 다가서려는 태도가 물씬 풍긴다. 도대체 어떤 사명감이 그에게 이런 태도를 가져다 준 것일까.
카파의 사진들을 보면서 보게 되는 것은 이중의 시선이다. 어느 사진가의 작품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하나는 피사체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을 향하는 카파의 시선이다. 일상의 평범을 사는 사람들의 시선은 때로는 서로를 향해 있고 때로는 카메라를 향해 있다. 카파는 그들을 자연스레 응시한다.
한편 전시의 공습경보를 듣고 하늘을 올려다 보는 도시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담은 몇몇 사진들에서, 카파의 시선은 하늘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확실성에 떠는 이들 도시민들을 향해 돌진한다.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하늘을 치켜다 볼 때, 카파의 눈길은 자신의 생명을 사리기에 앞서 생명의 가느다란 끈이 행여나 끊어질까 노심초사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공포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전후 파리에서 나치에 부역했던 한 여인이 머리를 삭발 당한 채 조롱을 당하며 거리에서 끌려다니는 사진은 조국을 배반한 한 여인이 겪는 수모가 어디까지 정당한 것인지 묻게 했다. 그 여인은 아마도 독일군과의 사이에서 낳았음직한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카파는 그 사진을 찍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는 적국에 대한 분노와 해방감에서 이제 죄 지은 여인을 벌레 보듯이 하는 파리 시민들의 편에서 사진을 들이대고 있었을까, 아니면 인간적 나약함과 잘못된 판단으로 죄를 지은 여인의 편에서 담담하게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을까이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의 손을 떠난 사진은 이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해석에도 내맡겨진 것이리라. 내게는 이미 무표정해진 얼굴로 아기를 바라보는 죄 지은 여인의 시선이 가슴에 남는다. 여인이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온통 자신을 조롱하고 무시하고 욕하는 날카로운 시선과 맞닥뜨릴 뿐이었으리라. 자신이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일을 했다는 자괴감과 더불어 자신을 그 상황으로 몰고 간 자기 삶의 모든 것들에 회한을 느끼고 있었으리라. 그 쌀쌀한 시선 앞에서 여인의 얼굴이 무표정해진 것은 당연지사다. 이제 아무 것도 바라볼 곳이 없는 여인의 시선은 자신의 품에 안긴 아기를 향한다. 그 아기는 자신의 죄를 고발하는 존재이자 자신의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생명체이다. 역사와 개인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제는 사랑하는 법마저 잊어버렸을 것 같은 여인.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는 비록 아무런 감동도 동요도 보이지 않지만, 눈에 직접 보이는 시선 너머로 아마도 체념 섞인 후회의 한숨과 더불어 일말의 사랑이 새근새근 온기를 내뿜고 있었으리라. 나는 카파의 카메라가 그 여인의 시선을 담고자 했었기를 바란다. 나만의 착각이어도 상관없지만. 분노에 사로잡힌 파리 시민이나 나치에 부역한 여인, 그 누구도 내가 임의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정의감에서 나온 분노가 또다른 상처를 낳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전 관람을 마치고 시청으로 돌아 나왔다. 서울시청 광장에서는 대통령에 항의하고자 시위 인파가 몰려들고 있었고, 무교동 쪽에서는 항의 시위에 반대하는 시위가 막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서로 맞불을 놓는 시위다카파가 지금 서울에 온다면 무슨 사진을 어떻게 찍고자 했을까. 대한문과 서울광장에서 떨리는 그의 손길은 어디를 향해 셔터를 누르고 있었을까. 인류의 광기와 비이성은 더 이상 서정시가 불가능한 시절에도 계속되고 있다.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 인간의 욕심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카파가 셔터를 눌렀다면 그들 중 진실의 편에 선 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흑백 사진 속 생명의 온기처럼 먼 훗날의 세대에게도 남게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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