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7 July 2013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것 Raising Awareness













교황님의 행보가 계속해서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번 많은 아프리카 난민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유럽으로 올 때
첫 기착지가 되는 람페두사 섬을 방문하신 데 이어서
이번 세계청년대회를 위해 방문하신 브라질에서는
Varginha라는 빈민촌을 직접 방문하신다고 한다...
Pope Francis's move continues to move people's hearts.
After a visit to Lampedusa island, which is the first stop-over 
for many Africans who risk their lives in order to come to Europe for better future,
this time, the Pope, who is visiting Brazil for WYD, is to visit Varginha, 
one of many impoverished villiages in the country.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우리 속담에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못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관심해도 좋다는 것은 결코 아닐 터이다.
더 나아가 가난이 계속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As Jesus said, there have been the poor all the time in human history.
According to a Korean saying, poverty cannot be overcome even by the government.
However, that does not justify our apathy towards the poor neighbours
nor to the root cause of the poverty. We need to constantly think about that.

다만 우리의 생활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항상 바쁘거나 
아니면 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여러 가지 요소들로 가득하다.
아무리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라도 당장 내 일이거나 가까운 이들이 겪는 일이 아니면
관심을 가지기도 어렵고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기가 십상이다.
It is only that our lives are often filled with busyness
or full of distractions that dissuade us from seeing the world as it is.
Even the important and urgent issues, unless they are our situations 
or something those who are close to us are experiencing,
can be slipped out of our minds or cannot get deserved attention.

어쩌면 교황님은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계신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분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위치에 계신 만큼,
교황님이 선택하시는 행선지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나 역시도 브라질의 빈민촌을 Favela라고 부른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한 빈민촌이 매우 많다는 점에 대해서 
교황님 덕분으로 처음 알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분 덕분으로 우리 신앙인의 의무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는 점이다.
Perhaps, the Pope is doing what he needs to do for the suffering people
as a member of the humanity himself.
But since he is in a position where all the ears and eyes of the world pay attention to,
his move is to attract people's interests necessarily.
For me also, I got to know the fact that Brazilian poor quarters are called 'Favela'
and that there are many such villages in Brazil, thanks to his visit to one of the villages.
More importantly, his visit to the poor and needy reminds me that
our duty as a faithful is to remember and to be with those who are poor and suffering.

일상의 쳇바퀴가 다시금 나의 눈과 귀를 막고 나의 가슴을 차갑게 하기 전에
교황님을 통해 보내시는 하느님의 메세지를 깊이 새겨들어야겠다.
Before my daily routine stops my ears and eyes and cools my hearts again,
I would like to engrave my heart with God's message which is sent through our Holy Father.

아,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시편 95장 7-8절)
O that today you would listen to his voice!
Do not harden your hearts.(Ps 95, 7-8)


Monday, 8 July 2013

프란치스코 교황님- Pope Francis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탈리아의 람페두사 섬을 방문하셨다는 외신을 접했다.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으로 불법 이민을 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넘어온다는 이 섬...
그 섬을 로마 밖의 첫 번째 사목 방문지로 선택하신 교황님의 행보에
깊은 메세지가 담겨 있다는 분석이다.
I read from a foreign media that Pope Francis visited an Italian island of Lampedusa.
This is an island where tens of thousands Africans come in risky journeys
in order to enter Europe 'illegally'.
The analysis is that the fact of choosing this island as the first pastoral visit
outside Rome already delivers a deep message of the pontiff.

교황님께서 집전하실 미사의 제대는
불법 이민자들과의 연대를 표현하기 위해
작은 배로 만들어져 있었다.
The altar where the Pope would say an open-air Mass
was a small boat to express the solidarity with the illegal migrants.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교황님의 행보는 내 자신의 삶과 그 방향성을 점검하게 하신다.
진정 이 시대가 교회의 쇄신과 인류의 반성을 위해
교황님의 거침없는 복음 선포가 계속 되기를 기도한다.
The option for the poor...
Pope's actions make me reflect on my life and its directions.
I sincerely pray that his outright proclamation of Gospel
keep going on for the renewal of the Church and the repentance of the humanity.

Saturday, 6 July 2013

SNS 단상 - Reflections on SNS

요즘 유행하는 소셜미디어를 나는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다.
게을러서이기도 하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써서 나누는 것이 부자연스럽기도 하고
범람하는 정보의 양을 읽고 소화하고 또 내 것을 생산해내는 그 모든 과정이 벅차기도 한 까닭이다.

오래간만에 어느 소셜미디어 싸이트를 방문했다.
너무나 많은 좋은 글들과 사진들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심오한 메세지들에서 받는 신선한 배움도 있었다.
마치 나 자신은 그동안 별다른 생각도 일도 없이 보내온 것 같은 자괴감...

허나 앗서라...
지인들과 네티즌들이 올리는 좋은 콘텐츠들로부터 배우고 성장하는 것은 좋지만
그 많은 데이터들 앞에서 내 소박한 생활을 비교하거나 탓하지 말자.
내 삶 안에서 나는 나대로의 성장과 배움의 기회를 수없이 받아 왔다...

실망하지 않는 법 Not to be disappointed

사람에게 실망할 때가 있다.
그런데 대개 그것은 내 눈으로 내 일만 바라볼 때 그러하다.
There are times when I get disappointed at others.
It is usually when I only see 'my' situations with 'my' viewpoints.

실망하지 않으려면
이해하려는 마음과 더 넓게 보려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혹여 내 행동과 마음가짐은 어떠한지 마음을 여며야 한다.
In order not to be disappointed,
the hearts that try to understand and the attitudes that try to look broader are needed.
And I also need to examine my own actions and attitudes.

그리고 섭섭한 마음은 흐르는 물에
감사한 마음은 돌에 새기라는 말씀을 기억하련다.
I remind myself of the saying that
we should write about what we felt sorry on the flowing water
and write about what we felt grateful on the rock.

Thursday, 27 June 2013

길 위에서

이창재 감독의 '길 위에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백흥암'에서 수행하시는 비구니 스님들의 한해살이를 담은 영화였다.

영화는 몇몇 비구니 스님들을 한 사람씩 비추어가며
그분들이 구도의 길에 들어서게 된 사연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나이도 다르고, 절에 들어오게 된 까닭도 다 다르지만,
그들의 삶은 누구보다도 치열해 보였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에 비춰진 불가의 법도는 사뭇 엄격해 보였다.
행자스님들이 계를 받기 위해 참석한 교육장에서,
묵언해야 하는데 떠들거라면 차라리 명찰을 떼고 떠들라는,
다시 말해서 그냥 나가라는 진행자 스님의 호통...
절간에도 삶이 있고 현실이 있으니 낭만적인 감상으로 출가하지 말고
좌초함 없는 꿋꿋한 구도의 길을 가라는 충고...
자신을 버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가르침...
그리고 '성불하십시오'라는 인사말...

영운 스님은 영화 후반부에서
구도자는 밥값을 해야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스님들이 90일 수행을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남이 해주는 밥을 얻어 먹고 있는 것이니,
수행에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그 밥값은 얼마나 무거운 것이 될 거냐는 말씀이셨다.

또한 깨달음에 정진하는 그 모습을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계셨다.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행을 한다고 앉아 있되 화두를 앞에 두고서 생각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화두를 진정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가지고 내려가
씨름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었다.

'구도의 길'이라는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가톨릭과는 사뭇 다른 불교의 세계관 안에서
말씀하시고 나누시는 스님들을 지켜 보면서
문득 이분들을 구도의 길로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궁금해졌다.

민재 행자는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절에 왔다고 한다.
그전에 종교생활과 무관하게 지내던 중 인터넷을 검색하며
구도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단다.
그런데 교회나 성당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믿는 것이지만
절은 자신을 믿는 것이에게 절에서 수행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어느 구도자나 '자신을 찾고 싶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렷다.
그러나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가톨릭 신앙 안에서 하느님은 은총을 퍼다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밥값을 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기에
오늘도 나는 밥값도 못한다는 자책감을 느끼며,
아니 때로는 그 자책감을 느낄 염치도 없이,
한 끼 두 끼 남들이 베풀어 주시는 밥을 먹는다.

그리고 가톨릭의 수행은 '깨달음' 자체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에 달려 있다.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형제처럼, 자매처럼, 연인처럼, 친구처럼,
그 모든 인간적 사랑의 이상을 합친 것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나의 욕망도 버리고, 나 자신도 버리고, 더 나아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조바심마저 버리는 구도의 길...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나 자신이 그처럼 살아가지 못해서 죄송하기는 하지만,
수많은 가톨릭 수행자들이 현세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지극히 불편하고 힘든 길을 애써서 걸어가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을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사랑마저도 바라보지 않는
불교 수행자들의 고행은 어디에서 그 힘을 얻는 것일까.
그 적막하고 아득한 구도의 길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는 것일까.
또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불편함과 고됨을 다 견디어 내는 것은
깨달음을 얻고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까???

나의 신앙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주제에,
불교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특히 불교 수행자들이 지향하는 곳과
그분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하는 물음들이 올라온다.

그러나 그 차이점과 궁금함을 넘어서서,
영운 스님이 말씀하시는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된다'는 말씀이
가톨릭 신앙 안에서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는 경지와 비슷한 무엇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의 모든 열망, 번뇌, 바램, 아픔 속에 함께 하고 계시는 하느님...
내 존재가 짊어진 십자가를 내 몸처럼 하나로 껴안을 때,
바로 그 때가 하느님과 내가 일치를 이루는 순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화두를 두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불교의 수행자들은
화두와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씨름하는 그 진정한 기도의 순간이
곧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문턱이라고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안팎에서 몰려 오는 수많은 질문들...
하지만 화면은 그처럼 간단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게만 매달려 있지 않았다.
마루에서 바라보는 한 여름의 거센 빗줄기,
불이 붙은 듯인 붉게 타오르는 단풍 나무 잎새들,
수북히 쌓은 눈을 삽으로 밀고 비로 쓰는 스님들,
칠흑같은 어둠과 먼동으로 비추어 오는 빛이 교차하는 사찰의 기와처마,
법당에서 엄숙하면서도 단아하게 드리는 아침 예불,
목탁 두드리는 법을 설명해 주시는 선배 스님,
불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김장을 하시는 스님들,
생일 케이크와 축하 노래를 부르는 모습,
만행길에 오르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담소를 나누고, 윷놀이를 하고,
부엌일을 하고, 청소를 하는 일상의 정경...

모자이크처럼 점점이 절간의 삶을 이루는 하나 하나의 장면들이
한국 고유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과 자연을 보여준다.
2천년이 넘는 세월을 한국인들의 정신세계 속에 자리잡아 온
불교의 면모가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런 종교심이 이미 우리에게 있었기에
외래 종교인 가톨릭의 수도생활도
우리에게 더 쉽게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영화 속에서 비구니 스님들 개개인의 사연과 아픔이
간간이 그분들의 말과 눈물 방울로 전달되기는 하였으나,
내가 더 궁금했던 것은 공동체 생활에서
오기 마련인 보다 현실적인 어려움들이었다.
아쉽게도 그 부분은 크게 부각되어 다뤄지지 않았다.
아마도 촬영을 위해 함께 머물면서도 여전히 외부인일 수밖에 없었기에
깊이 들어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감독의 관심사는 어떤 동기와 사연으로 절에 오게 되었나에
더 깊이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몇 해 전 유럽의 어느 봉쇄 수도원의 삶을 닮은 '대침묵'이라는 작품이
그곳 젊은이들 사이에서 잔잔한 열풍을 일으켰다고도 하고,
또 신학교의 일상을 담은 우리 나라 방송사의 다큐멘터리가
가톨릭 종교인에 대한 신선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이 다큐멘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면서도
세상의 길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과 호기심을 주는
여성 불교수행자들의 모습을 담음으로써
경쟁과 물질만능주의에 찌든 현대인들의 또다른 갈망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단순히 그런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또 하나의 눈요기거리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자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각자의 치열함으로 절간을 지키는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네 삶의 현실이 곧 구도의 길이어야 함을
가슴 속 깊은 울림으로 깨닫게 해주는 영화로 남았으면 좋겠다.

공동체로 돌아오는 길, 마음 속에 남는 영화의 잔상들...
지하철과 버스에서, 평소에 하듯이 가방에 든 책을 꺼내어 손에 드는 대신
앉아 있는 이들, 서 있는 이들, 그리고 걷고 있는 이들을
좀 더 유심히 바라본다.

Tuesday, 9 April 2013

수도회와 NGO - Jesuits and NGO

아태 지역구 개발회의 참석차 한국에 오신
콜롬비아 출신 Jorge Eduardo Serrano-Ordonez 신부님을 잠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I had a chance to meet Fr Jorge Eduardo Serrano-Ordonez SJ
who were visiting Korea for development meeting for AP assistancy.

그분께 'development'의 의미에 대해서 여쭈었는데,
그분의 말씀을 자구대로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미국에서 사용하는 의미는 단순하게 무엇을 짓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를 형성하고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셨던 것 같다.

I asked him about the meaning of the word 'development'.
I cannot remember what he said word by word,
but as far as I can recall, he said that especially in the meaning
that is usually understood in the U.S.
'development' means to build a relationship and share with others
instead of just constructing buildings.

한편 예수회원으로서 사회 사도직을 하는 것과
일반 사회의 NGO 활동이 어떤 차이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여쭈었는데,
수도자로서 하는 활동은 결국 하느님 왕국을 건설하는 데에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NGO 활동과 차이를 지닐 수 있다고 하셨다.
즉 상대방이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도움을 받고 자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상대방의 삶에 복음적 가치가 자리잡을 수 있게 하는 것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활동 목표라는 말씀이시다...

I also asked him about the differences between social apostolate of Jesuits
and the civil NGO works.
He says that the aim of activities by the religious is in the end
to build the Kingdom of God and that can be a difference between those two.
That is, we are not satisfied with meeting beneficiaries material needs,
but we want to go further where we can help them live in an environment
in which Gospel values are alive.

궁금한가? - Do you have questions to your loved ones?

지난 주 청년토크에서는 서울대교구 최용진 신부님께서
청원기도에 대한 강연을 해 주셨다.
신부님 강연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지만
많은 사람들이 더이상 물음표를 던지지 않고 느낌표를 찍는다는 것...
상대방에 대해 궁금해하고 그 사람의 생각과 바램을 헤아려 보려고 하기보다는
이미 생긴 선입견에 의한 답을 내리고 단정을 짓는다는 것...

Last week in 'Young people's talk',
Fr Choi Yong-Jin from Seoul Arch Diocese held a talk about petition prayers.
He says we put up a question mark to those we love
but after a while many of us put up a exclamation mark instead of question marks.
That means we are not interested to know about others anymore
and we just make judgement towards others based on our prejudice.
Asking questions means we are interested in them and we want to know about them.

기도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에 대해 얼마나 궁금해하고 있는가
물어보라고 말씀을 하셨다...

He asked us how much we are interested in God... whether we ask questions to Him
about how He feels and th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