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27 June 2013

길 위에서

이창재 감독의 '길 위에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백흥암'에서 수행하시는 비구니 스님들의 한해살이를 담은 영화였다.

영화는 몇몇 비구니 스님들을 한 사람씩 비추어가며
그분들이 구도의 길에 들어서게 된 사연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나이도 다르고, 절에 들어오게 된 까닭도 다 다르지만,
그들의 삶은 누구보다도 치열해 보였다.
그리고 다큐멘터리에 비춰진 불가의 법도는 사뭇 엄격해 보였다.
행자스님들이 계를 받기 위해 참석한 교육장에서,
묵언해야 하는데 떠들거라면 차라리 명찰을 떼고 떠들라는,
다시 말해서 그냥 나가라는 진행자 스님의 호통...
절간에도 삶이 있고 현실이 있으니 낭만적인 감상으로 출가하지 말고
좌초함 없는 꿋꿋한 구도의 길을 가라는 충고...
자신을 버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가르침...
그리고 '성불하십시오'라는 인사말...

영운 스님은 영화 후반부에서
구도자는 밥값을 해야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스님들이 90일 수행을 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남이 해주는 밥을 얻어 먹고 있는 것이니,
수행에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그 밥값은 얼마나 무거운 것이 될 거냐는 말씀이셨다.

또한 깨달음에 정진하는 그 모습을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계셨다.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수행을 한다고 앉아 있되 화두를 앞에 두고서 생각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화두를 진정 마음 속 깊은 곳으로 가지고 내려가
씨름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었다.

'구도의 길'이라는 공통 분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가톨릭과는 사뭇 다른 불교의 세계관 안에서
말씀하시고 나누시는 스님들을 지켜 보면서
문득 이분들을 구도의 길로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궁금해졌다.

민재 행자는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절에 왔다고 한다.
그전에 종교생활과 무관하게 지내던 중 인터넷을 검색하며
구도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단다.
그런데 교회나 성당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믿는 것이지만
절은 자신을 믿는 것이에게 절에서 수행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어느 구도자나 '자신을 찾고 싶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렷다.
그러나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가톨릭 신앙 안에서 하느님은 은총을 퍼다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밥값을 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믿기에
오늘도 나는 밥값도 못한다는 자책감을 느끼며,
아니 때로는 그 자책감을 느낄 염치도 없이,
한 끼 두 끼 남들이 베풀어 주시는 밥을 먹는다.

그리고 가톨릭의 수행은 '깨달음' 자체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에 달려 있다.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형제처럼, 자매처럼, 연인처럼, 친구처럼,
그 모든 인간적 사랑의 이상을 합친 것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나의 욕망도 버리고, 나 자신도 버리고, 더 나아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조바심마저 버리는 구도의 길...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나 자신이 그처럼 살아가지 못해서 죄송하기는 하지만,
수많은 가톨릭 수행자들이 현세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지극히 불편하고 힘든 길을 애써서 걸어가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을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사랑마저도 바라보지 않는
불교 수행자들의 고행은 어디에서 그 힘을 얻는 것일까.
그 적막하고 아득한 구도의 길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는 것일까.
또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불편함과 고됨을 다 견디어 내는 것은
깨달음을 얻고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까???

나의 신앙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주제에,
불교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특히 불교 수행자들이 지향하는 곳과
그분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 하는 물음들이 올라온다.

그러나 그 차이점과 궁금함을 넘어서서,
영운 스님이 말씀하시는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된다'는 말씀이
가톨릭 신앙 안에서 하느님과 합일을 이루는 경지와 비슷한 무엇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의 모든 열망, 번뇌, 바램, 아픔 속에 함께 하고 계시는 하느님...
내 존재가 짊어진 십자가를 내 몸처럼 하나로 껴안을 때,
바로 그 때가 하느님과 내가 일치를 이루는 순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화두를 두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불교의 수행자들은
화두와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씨름하는 그 진정한 기도의 순간이
곧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문턱이라고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안팎에서 몰려 오는 수많은 질문들...
하지만 화면은 그처럼 간단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게만 매달려 있지 않았다.
마루에서 바라보는 한 여름의 거센 빗줄기,
불이 붙은 듯인 붉게 타오르는 단풍 나무 잎새들,
수북히 쌓은 눈을 삽으로 밀고 비로 쓰는 스님들,
칠흑같은 어둠과 먼동으로 비추어 오는 빛이 교차하는 사찰의 기와처마,
법당에서 엄숙하면서도 단아하게 드리는 아침 예불,
목탁 두드리는 법을 설명해 주시는 선배 스님,
불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김장을 하시는 스님들,
생일 케이크와 축하 노래를 부르는 모습,
만행길에 오르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담소를 나누고, 윷놀이를 하고,
부엌일을 하고, 청소를 하는 일상의 정경...

모자이크처럼 점점이 절간의 삶을 이루는 하나 하나의 장면들이
한국 고유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과 자연을 보여준다.
2천년이 넘는 세월을 한국인들의 정신세계 속에 자리잡아 온
불교의 면모가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
어쩌면 그런 종교심이 이미 우리에게 있었기에
외래 종교인 가톨릭의 수도생활도
우리에게 더 쉽게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영화 속에서 비구니 스님들 개개인의 사연과 아픔이
간간이 그분들의 말과 눈물 방울로 전달되기는 하였으나,
내가 더 궁금했던 것은 공동체 생활에서
오기 마련인 보다 현실적인 어려움들이었다.
아쉽게도 그 부분은 크게 부각되어 다뤄지지 않았다.
아마도 촬영을 위해 함께 머물면서도 여전히 외부인일 수밖에 없었기에
깊이 들어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감독의 관심사는 어떤 동기와 사연으로 절에 오게 되었나에
더 깊이 치우쳐져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몇 해 전 유럽의 어느 봉쇄 수도원의 삶을 닮은 '대침묵'이라는 작품이
그곳 젊은이들 사이에서 잔잔한 열풍을 일으켰다고도 하고,
또 신학교의 일상을 담은 우리 나라 방송사의 다큐멘터리가
가톨릭 종교인에 대한 신선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었다.

이 다큐멘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면서도
세상의 길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과 호기심을 주는
여성 불교수행자들의 모습을 담음으로써
경쟁과 물질만능주의에 찌든 현대인들의 또다른 갈망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단순히 그런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또 하나의 눈요기거리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각자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각자의 치열함으로 절간을 지키는
비구니 스님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네 삶의 현실이 곧 구도의 길이어야 함을
가슴 속 깊은 울림으로 깨닫게 해주는 영화로 남았으면 좋겠다.

공동체로 돌아오는 길, 마음 속에 남는 영화의 잔상들...
지하철과 버스에서, 평소에 하듯이 가방에 든 책을 꺼내어 손에 드는 대신
앉아 있는 이들, 서 있는 이들, 그리고 걷고 있는 이들을
좀 더 유심히 바라본다.

Tuesday, 9 April 2013

수도회와 NGO - Jesuits and NGO

아태 지역구 개발회의 참석차 한국에 오신
콜롬비아 출신 Jorge Eduardo Serrano-Ordonez 신부님을 잠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I had a chance to meet Fr Jorge Eduardo Serrano-Ordonez SJ
who were visiting Korea for development meeting for AP assistancy.

그분께 'development'의 의미에 대해서 여쭈었는데,
그분의 말씀을 자구대로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미국에서 사용하는 의미는 단순하게 무엇을 짓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를 형성하고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셨던 것 같다.

I asked him about the meaning of the word 'development'.
I cannot remember what he said word by word,
but as far as I can recall, he said that especially in the meaning
that is usually understood in the U.S.
'development' means to build a relationship and share with others
instead of just constructing buildings.

한편 예수회원으로서 사회 사도직을 하는 것과
일반 사회의 NGO 활동이 어떤 차이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여쭈었는데,
수도자로서 하는 활동은 결국 하느님 왕국을 건설하는 데에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NGO 활동과 차이를 지닐 수 있다고 하셨다.
즉 상대방이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도움을 받고 자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상대방의 삶에 복음적 가치가 자리잡을 수 있게 하는 것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활동 목표라는 말씀이시다...

I also asked him about the differences between social apostolate of Jesuits
and the civil NGO works.
He says that the aim of activities by the religious is in the end
to build the Kingdom of God and that can be a difference between those two.
That is, we are not satisfied with meeting beneficiaries material needs,
but we want to go further where we can help them live in an environment
in which Gospel values are alive.

궁금한가? - Do you have questions to your loved ones?

지난 주 청년토크에서는 서울대교구 최용진 신부님께서
청원기도에 대한 강연을 해 주셨다.
신부님 강연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지만
많은 사람들이 더이상 물음표를 던지지 않고 느낌표를 찍는다는 것...
상대방에 대해 궁금해하고 그 사람의 생각과 바램을 헤아려 보려고 하기보다는
이미 생긴 선입견에 의한 답을 내리고 단정을 짓는다는 것...

Last week in 'Young people's talk',
Fr Choi Yong-Jin from Seoul Arch Diocese held a talk about petition prayers.
He says we put up a question mark to those we love
but after a while many of us put up a exclamation mark instead of question marks.
That means we are not interested to know about others anymore
and we just make judgement towards others based on our prejudice.
Asking questions means we are interested in them and we want to know about them.

기도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에 대해 얼마나 궁금해하고 있는가
물어보라고 말씀을 하셨다...

He asked us how much we are interested in God... whether we ask questions to Him
about how He feels and thinks...

Monday, 1 April 2013

빈 무덤(요한 복음 20,11-18) - The empty Tomb(Jn 20,11-18)

Meanwhile Mary stayed outside near the tomb, weeping.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빈 무덤 앞에 서서 울고 있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더 이상 그녀 곁에 계시지 않으니 희망도 기쁨도 사라졌지만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그 자리에 머물러 자신의 슬픔과 허탈함을 직면하고 있었다.

Mary of Magdala was weeping in front of the empty tomb and she was there because she loved Jesus so much. Jesus died on the cross and was no more with her. There remained no more hope and joy, but her love for Jesus made her stay near the tomb and face her own sorrow and dejection.

매년 찾아오는 부활이 지났다. 그런데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까. 아직도 빈 무덤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aster has come as usual in this time of the year. But did I meet the resurrected Jesus? Am I not still just looking at the empty tomb?

마리아가 자신의 어두움, 즉 빈 무덤을 지키고 섰을 때, 그녀는 울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다 she stooped to look inside (Jn 20,11)'.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주는 천사들을 보았다. 어쩌면 나는 빈 무덤 앞에 서서 울고 떼를 쓰기는 할지언정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기를 회피하는지도 모른다. 자꾸만 다른 일에 몰두하고 다른 일에 관심을 쏟으면서 애써 나의 어두움을 제껴 두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언젠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부드럽게 나를 부르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When Mary was keeping vigil near at her darkness, or the empty tomb, she was not just weeping but she 'stooped to look inside (Jn 20,11)'. And she saw the angels who heralded her Jesus' resurrection. Perhaps, I may be standing in front of the empty tomb, weeping and nagging. But I may not be trying to look inside the tomb. I may be distracting myself by doing and indulging in other things. Even so, would I hear the voice of Jesus some day calling me gently?

부활의 체험은 스스로 노력해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빈 무덤 곁을 지키고 서는 것, 그리고 그 안을 부단히 들여다 보는 것은 나의 몫이다. 직접 오셔서 나를 부르시고 부활의 따스함으로 내 삶을 채워주시는 것, 그것은 그분의 몫이요, 그분이 주시는 선물일 따름이다.

Easter experience must not be something you gain with efforts. The only thing you have to do is to keep vigil and to look into your own empty tomb out of love for Jesus. It is His choice and His gift that He Himself comes and calls me filling my life with the warmth of resurrection.

양곤의 추억 - Memories from Yangon

내가 일하던 Campion Institute의 farewell party 중에...
Director Fr Toto와 예수회 동료 Br Xavier























2년 동안 실습을 한 미얀마 양곤...
지난 달, 실습을 마무리하면서 많은 이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한 분 한 분 감사한 분들...

2 years regency in Yangon, Myanmar...
Last month, I had to say lots of good-byes.
I thank each one of them...

무엇보다도 귀국하기 전 얼마 동안이나마
미얀마의 다른 곳들을 다니며
보다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은
분에 넘치는 선물이었다.

Just before I returned to Korea,
I had an opportunity to visit other parts of Myanmar
so that I could see, hear, and reflect on different things.
It was a gift more than I deserve.

이제 귀국한 지도 1주일이 넘다 보니
양곤의 추억도 저멀리 사라져 가는 것만 같다.
여기에서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도 자꾸 생기고
너무도 편리하고 세련된 한국 도시의 생활에
다시금 익숙해지고 말았다.

Now that more than a week passed by since my arrival in my home country.
And the memories in Yangon seem to gradually fade away.
I see things I have to do and things I would like to do in my daily life.
And I am accustomed to such a convenient and sophisticated urban life in Korea.

2년 전 실습을 떠날 때,
나는 가난과 사랑의 체험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가끔 문화와 언어의 장벽,
그리고 내 칠칠치 못함으로 좌절이 밀려올 때,
나는 내가 가진 보잘 것 없음의 가난함과,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내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곤 했다.
'가난'과 '사랑'의 체험이기는 한데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체험이라고
하느님을 원망했던 것이다.

When I was leaving for regency 2 years ago,
I wanted to have an experience of poverty and love.
However, whenever the waves of discouragement and frustration overwhelmed me,
I used to witness with regret the poverty of my lowliness,
and the situation I was at where I had to learn to give love instead of being loved.
It was an experience of 'poverty' and 'love'
but in an opposite way than I expected, I grumbled to God.

하지만 실습기를 마치고
지인들과 작별하고 그곳에서의 추억을 접어두고
서울에 돌아와 이 글을 쓰는 지금...
난 정말 내가 바라던 방식으로
'가난'과 '사랑'을 체험하고 왔던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But now after I finished my regency,
after having said many farewells to my friends,
after tucking away memories there into the drawers of my mind,
I am writing this in Seoul...
And I come to think that I experienced 'poverty' and 'love'
in a way exactly that I expected.


물론 내 자신의 가난함도 보았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할 줄 알아야 함도 배웠다.
하지만 나는 하느님 앞에서 나와 이웃의 가난함 안에서도
우러나오는 부유함도 보았고,
그리고 내 주변의 형제자매들로부터 많은 사랑도 받았던 것이다.


Of course I saw the poverty of my lowliness
and I learned the need to love before waiting to be loved.

But I also saw richness of God that comes out of poverty in me and my neighbours.
And I was 'loved' by my fellow brothers and sisters.

이 소중한 기억들을 잊지 말자.
그리고 삶에서 가끔 축 쳐질 때는 다시 되새기자.
내 가난함 안에서 주님의 풍요로움을 보고
내가 사랑함에서 다른 사람에게 이미 사랑받고 있었음을 깨닫자.
그리고 포기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나아가자!

Let's not forget these precious memories.
Remind me of these memories whenever I feel down.
Remember that I saw His richness in poverty
and that I could realise I was being loved when I first loved others.
And let me not give up but step forward in our Lord!

Sunday, 31 March 2013

희망과 용기의 강론 - A homily of hope and courage

인터넷에서 새로 선출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부활 성야 미사 강론을 읽었다.
그 분은 낯섬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열 수 있기를,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의탁할 수 있기를, 요청하셨다.
그리고 그 힘은 그 분의 언행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되돌아보는 데에서 나온다고 하셨다.


I read Easter Vigil homily by newly-elected Pope Francis on the Internet.
He asked we open our hearts to Jesus' invitation to Newness,
that we depend on Him without giving up.
He also pointed out that the strength to do that
would come from remembering His words and deeds.


1주일 여전 양곤에서 귀국한 이후,
다시금 일상 패턴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하는 나에게
왠지 희망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시다.

I came back to Korea from Myanmar about a week ago,
and I find myself to be dragged into the swamp of my usual daily patterns.
Our pope's homily gave me hope and courage.

Monday, 23 April 2012

Total trust - 온전한 의탁

외국인으로서 타국을 방문할 때에,
여권이며 비자며 항공권이며...
챙겨야 할 것이 많다.
마닐라 방문길에 비자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려 애를 먹고 있다.
그렇게도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법을 배우겠다고 다짐했는데도,
이 작은 불편함과 불확실성 앞에서 또다시 그분을 잊어버리고 만다...
주님 제 믿음을 키워주소서.

To visit foreign countries as non-national,
we need to take care of many things such as passport, visa, and air-tickets...
Due to the red-tape, which does not care about personal situations,
I am having a hard time in Manila.
So many times have I decided to learn how to totally trust in God,
but now with this small discomfort and uncertainty,
I totally forget about Him again... Help my unbeli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