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최근에 알게 된 어떤 어린 친구가 커다란 슬픔을 겪게 되었다. 용감한 아이라 혼자서 슬픔을 이겨내는 타입이다. 참으로 힘겨운 소식을 듣고 나서 문득 내가 감히 그 슬픔의 깊이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A few days ago, I heard of a news that a friend of mine whom I came to know quite recently underwent a very grave tragedy. She is a kind of courageous type who tends to be independent and does not want to depend on others to be consoled. After I heard the news, I suddenly realised that I could not even dare to understand the depth and width of the sorrow that she might be going through.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끼셨다. 그런데 나는 다른 이들의 아픔을 과연 얼마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을까. 내 삶의 작은 불편함에는 목놓아 울면서 다른 사람들의 상실과 고통에는 무심한 것이 아닌가. 아니, 무심하기에 앞서 타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Jesus felt deep compassion towards other people's sorrow. But how much can I understand that? I cry out aloud over petty inconveniences in my life but can be very much indifferent towards loss and pain of the others. No, not just indifferent. Do I really have the will and capacity to understand them?
어줍잖은 위로를 하려고 덤비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누군가의 슬픔에 진정한 연민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Instead of trying to console others without a slightest idea of what their sorrows might be, I wish to be a person of true compassion. Just like Jesus himself...
Tuesday, 27 July 2010
Thursday, 22 July 2010
마리아 막달레나 - Mary Magdalene
어떤 책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조각상을 보게 되었다. 도나텔로가 나무로 조각한 이 조각상은 마리아의 여성성을 부각하기 보다는 남루한 옷에 비참한 얼굴 표정으로 파격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그 책의 저자는 그리스 여신상의 튜닉을 닮은 마리아의 남루한 옷이 오히려 더욱 강렬한 효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I happened to come across a wooden sculpture of Mary Magdalene in an art book. It was a piece of art by a Florentine artist Donatello(1386-1466). This sculpture carries an exceptional beauty. Instead of focusing on a feminine beauty of Mary, the artist depicts desparate expression of her face and her situation, though not clearly seen what she might have been through, with worn-out garments on. The author of the book says her dress, which resembles a tunic of Greek goddesses, rather stresses Mary's tragic state.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그다지도 사랑했던 사람이다. 조각에서 나타나듯 간절한 표정으로 두 손을 모은 그녀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그녀의 얼굴에서 단순한 절망보다는 마지막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그분께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읽힌다. 성서의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Mary Magdalene loved Jesus so much. In the sculpture where Mary is putting her hands together with a desparate expression on her face, what could be her innermost emotions now? Well, I see in her not a simple despair but a heart facing God in a way that she put the last hope in Him. Somehow it reminds me of the parable in the Bible: the prodigal son.나이가 들면서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의 문제를 대신 고민해 줄 수도, 책임져 줄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모나 선생님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깨닫는 순간은 고독한 순간이기도 하다. 결국 자신의 일은 자신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순간...
As I grow older, we realise there is no one on earth who can worry about things for me or can bear responsibility for me. The time when you realise neither parents nor teachers are omnipotent is the time of solitude. The moment of truth that you are the only one who can be responsible for yourself...
그러나 유한한 인간이 얼마나 '책임'질 수 있겠는가. 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쓰라림이 있을지라도 정말 돌아가야 할 곳이, 정말 기댈 수 있는 곳이, 우리 곁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독함인지도 모른다. 도나텔로의 마리아는 멀고 긴 길을 돌아서 이제는 궁극적으로 가야할 길을 깨닫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살짝 아래로 향한 눈은 이제 마음 속에서 깊은 사랑으로 그분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But how much responsibility can a human, who is a 'finite' being, fulfill? Perhaps, that moment of solitude may be a passage of rite in order to realise there is a Being whom we ultimately turn to, a Being whom we can truly rely on. Donatello's Mary must've been realised where she should turn to after a long journey. Her slightly down-cast eyes are now looking at Him in her deepest heart of love.
그림: 도나렐로 '막달라 마리아' 조각상 스케치
Picture: a sketch of Donatello's 'Mary Magdalene'
Friday, 16 July 2010
남는 것은 사랑 - Love which remains to the last
풍경화 전시회를 찾았다. 터너와 컨스터블로 대표되는 영국 풍경화와 이들이 프랑스 인상주의에 미친 영향을 주제로 삼은 전시회였다.
I recently visited an exhibition of landscape paintings. The theme of the exhibition was English lanscape painting mainly, though not entirely, represented by Turner and Constable, and their impact on French impressionism.
인물화와 정물화를 거쳐서 가장 마지막에 발전하게 되었다는 풍경화... 전시장을 가득 메운 나무, 구름, 호수, 바다, 가축들, 그리고 전원풍경을 보며 인간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처럼 인간을 감싸주는 자연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화가들이 그제서야 인간을 둘러싼 자연에 눈을 돌린 것이다. 더이상 인간만이 주인공이라는 착각을 버리고...
Landscape painting is a genre developed only after portrait, or depiction of people, and still-life. While looking at paintings of the trees, clouds, lakes, sea, livestock, and pastures, I came to think man cannot exist alone, but that he can exist only in the bossom of the mother nature. Maybe painters could turn their eyes only then to the surrounding nature. They could awaken their minds from the illusion of man's being the main character of the whole universe.
전시회 벽에는 문구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어떤 풍경화 교본의 저자는 풍경화를 여러 가지 미술적 기교를 통해 인간에게 아름다움의 기쁨을 전해 주는 것이라고 정의내리고 있었다. 음... 풍경화를 그렇게 정의내리다니... 아무리 주제를 인간에서 자연으로 전환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인가 싶었다.
On the walls of the exhibition hall were written some sentences. One of them was by a certain author of a textbook for landscape painting. According to his definition, landscape painting is to give aesthetic pleasure to human being through artistic skills of painting nature. Is that the definition for landscape painting? Well, I was a bit disappointed by his description. If then, even if painters turned their eyes from man to nature, it still was trapped in the idea of 'human-centeredness'.
그런데 우리들에게 작품을 설명해 주던 도슨트가 전시회 투어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어느 화가가 풍경화를 그리는 이유였다. 그것은 단지 그가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But the docent who guided us throught the exhibition conveyed her final remark at the end of the tour from a landscape painter. It was about why he painted landscape. And the reason was because he loved nature.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코 우리의 시각에서 사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에 사랑을 담는 것이 아닐까. 그럴 때에만 오만한 인간중심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닐런지...
Well, no matter how hard we try, we may only be able to see the world from our own restricted view. But the important thing is to put love in it. Only then we could be free from the proud notion of human-centeredness.
그림설명: 존 에버렛 밀레이 '버넘 협곡'
Painting: 'Glen Birnham' by John Everett Millais
Monday, 12 July 2010
좁은 문 - A narrow door
팔공산에 중암암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다. 그곳에는 욕심을 버려야만 지나갈 수 있다는 돌로 된 통로가 있다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 놓아야 한다. 마음의 근심과 슬픔까지도... 그것이 참 쉽지 않은 일이리라.
There is a hermitage in Mt.Palgong. In this small Buddhist temple, there says to be a narrow passage made out of stone thorugh which you can pass only after putting down your greed. To pass through a narrow door, we need to put down what we have in our hands, or even possibly, in our minds. I mean, worries or sorrows. That is not always easy.
[루카 복음 13,22-24]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Luke 13,22-24]
Jesus went through towns and villages, teaching the people and making his way toward Jerusalem. Someone asked him, "Sir, will just a few people be saved?" Jesus answered them, "Do your best to go in through the narrow door; because many people will surely try to go in but will not be able."
There is a hermitage in Mt.Palgong. In this small Buddhist temple, there says to be a narrow passage made out of stone thorugh which you can pass only after putting down your greed. To pass through a narrow door, we need to put down what we have in our hands, or even possibly, in our minds. I mean, worries or sorrows. That is not always easy.
[루카 복음 13,22-24]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Luke 13,22-24]
Jesus went through towns and villages, teaching the people and making his way toward Jerusalem. Someone asked him, "Sir, will just a few people be saved?" Jesus answered them, "Do your best to go in through the narrow door; because many people will surely try to go in but will not be able."
Friday, 9 July 2010
쓸모 없음의 쓸모 - Usefulness of the Useless
헨리 나웬 신부님이 쓰신 어떤 책에서 중국에서 전래된 이야기를 하나 읽게 되었다.
In a Henri Nouwen's book I read an old story from Chnia.
목수 한 사람이 그의 제자와 함께 커다란 숲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높고, 크며, 옹이가 지고, 오래되고, 아름다운 떡갈나무 앞을 지나게 되었을 때, 목수는 자신의 제자에게 물었다. "얘야, 너는 왜 이 나무가 이다지도 높고, 크며, 옹이가 지고, 오래되고, 아름다운지 알고 있느냐?"
제자는 스승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A carpenter and his apprentice were walking together through a large forest. And when they came across a tall, huge, gnarled, old, beautiful oak tree, the carpenter asked his apprentice: "Do you know why this tree is so tall, so huge, so gnarled, so old and beautiful?"
The apprentice looked at his master and said:
"잘 모르겠습니다...왜 그렇죠?"
"No ... why?"
스승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건 말이다,이 나무가 쓸모 없는 나무이기 때문이지. 만약에 이 녀석이 쓸모가 있는 재목감이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베어져서 책상이나 의자로 만들어졌겠지. 허나 이 녀석은 쓸모가 없는 재목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높이, 아름답게 자라나 그늘을 주고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는 것이지."
"Well," the carpenter said, "because it is useless. If it had been useful it would have been cut long ago and made into tables and chairs, but because it is useless it could grow so tall and so beautiful that you can sit in its shade and relax."
Tuesday, 6 July 2010
중대한 이유 - A grave reason
일전에 어떤 학자 한 분을 만났다. 그분께 왜 그 분야를 공부하게 되셨는지를 물었다. 내심 영성적이고 심각한 이유를 기대하면서... 그런데 그분의 답변은 너무도 평범하고 필연성이 없어 보이는 소소한 것이었다...
Once I met a scholar. I asked him why he chose that field of studies, expecting a rather spiritual and grave reason... But his answer seemed to be so plain and lacked necessity to me...
어떤 일을 하는 데에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이고도 심중한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살아가다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성찰 없이 대충대충 사는 것과 그저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Do we need a necessary and grave reason to do something? Well, it may not be always the case. Then what is difference between living a life without thinking or living a life following the Providence?
어떤 선택을 위해서 중대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하지만 이왕에 선택한 것이라면 중대한 이유가 있기라도 한듯이 수행하는 것도 필요하리라.
Perhaps it is better to give up the notion that we need a grave reason to choose something. However, if something is chosen, it is better to perform the duties evolved in it as if there existed a grave reason.
Once I met a scholar. I asked him why he chose that field of studies, expecting a rather spiritual and grave reason... But his answer seemed to be so plain and lacked necessity to me...
어떤 일을 하는 데에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이고도 심중한 이유가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살아가다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성찰 없이 대충대충 사는 것과 그저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Do we need a necessary and grave reason to do something? Well, it may not be always the case. Then what is difference between living a life without thinking or living a life following the Providence?
어떤 선택을 위해서 중대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하지만 이왕에 선택한 것이라면 중대한 이유가 있기라도 한듯이 수행하는 것도 필요하리라.
Perhaps it is better to give up the notion that we need a grave reason to choose something. However, if something is chosen, it is better to perform the duties evolved in it as if there existed a grave r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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