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21 April 2010

그리스도께 자유를! - Free your Christ!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너무도 당당하게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하시더니 뜬금없이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신다. 당신께서 스스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는 분이다. 그 때 그 순간의 베드로와 제자들은 과연 그러한 그리스도 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When asked, 'Who do you think I am?', Peter answers Jesus 'The Christ of God!' with much confidence. On hearing the 'right' answer, Jesus sternly tells the disciples not to tell anyone about his identity. And he mentions for the first time about his 'Passion and Resurrection'. The image of Christ that Jesus himself is describing is the one 'who must suffer many things and be rejected by the elders, chief priests and teachers of the law, and also must be kill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to life'. I wonder whether Peter and the disciples at that time fully understood his words and accepted this 'terrible' image of the Christ.

성경을 읽거나 강론을 들으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예수님은 소외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오신 분이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말하고 있듯이 예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복음을 선포하신다. 하지만 과연 '소외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오셨다'라는 언어적 표현만으로 그리스도를 다 담을 수 있을까. 그 표현이 전적으로 잘못 되었다기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소외'와 '억압'이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셨던 '소외'나 '억압'과 얼마나 일치하는 것인지 성찰해 볼 일이다.

When I read the Bible or hear homilies, I often draw the images of Jesus who came to the world for the excluded and persecuted. As the Church pronounces 'the option for the poor', Jesus proclaims the Gospel for the poor people. However, could the human expression of 'Jesus came to the world to free those who are excluded and persecuted' contain every aspect of the Christ? I do not mean to say this interpretation of mine(and perhaps many others) is totally wrong. I would just like to ask myself whether my understanding of 'exclusion' and 'persecution' perfectly match Jesus' understanding(if I dare use this verb 'understand' to him) of those terms.

베드로와 제자들은 자신들 나름의 그리스도 상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따랐을 것이다. 나 역시 내가 생각하는 그분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하지만 점점 드는 생각은 그리스도를 아무리 멋지게 정의(定義)내리더라도 그분은 항상 그 정의보다 더 크신 분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나도 모르게 그분을 내 선입견 속에 가두어 드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리하여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고 계시는 당신의 진정한 모습에 대해서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고 복음을 바라보아야 할 터이다. 그리스도를 그분 스스로 선포하시는대로 자유롭게 풀어드리자!

I am pretty much sure that Peter and his fellow brothers followed Jesus with their own image of the Messiah. I also have my own idea of who Jesus is or should be. But more recently I came to think that Jesus is always greater than my defintion of him. No matter how hard I try to describe him, he is always much more than what human words and ideas can contain. Maybe I am 'imprisoning' him into my own prejudice and therefore I am deaf and blind to his true image? So, I have to keep my eyes and ears wide open unto the Gospel. Let us free our Christ and receive him as he himself proclaims!

- 사진 설명: 독일 Merseburg 성당의 십자고상

- Photo: Cruxifix in the Church of Merseburg, Germany

루카 복음 9,20-22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Luke 9,20-22

"But what about you?" he asked. "Who do you say I am?" Peter answered, "The Christ of God."
Jesus strictly warned them not to tell this to anyone.

And he said, "The Son of Man must suffer many things and be rejected by the elders, chief priests and teachers of the law, and he must be kill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to life."

Wednesday, 7 April 2010

예수님의 미소, 천안함 장병들을 위해 - Smile of Jesus, for the sailors of the Corvette Cheonan

강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배에 오른 제자들과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풍랑 속에서 두려워 하는 제자들을 두고서 편안하게 단잠을 즐기셨다. 아마도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주무시고 계시지 않았을까. 그분은 무슨 꿈을 꾸고 계셨을까. 그분은 무엇을 믿고 계셨을까.

Jesus and his disciples on board a ship bound for another side of the lake... Jesus was enjoying a deep sleep while the disciples were being scared to death in the middle of a windstorm. I assume he was sleeping with a smile on his face. What was he dreaming about? What was it that he was so sure about?

스페인의 하비에르 성에는 미소 띤 십자고상이 있다고 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뱃전에서 느긋한 잠을 주무셨다는 대목에서 문득 그 십자고상의 예수님이 떠오른다. 사지가 녹아드는 고통에 처하신 예수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 까닭은 무엇일까. 그런 예수님 얼굴을 조각한 사람의 마음엔 무엇이 서려 있었을까.

In Xavier Castle in Spain, there is a Cruxifix with a smile. I saw the photo of it once. These Lukan passages remind me of the smiling Jesus in the castle. Why was he smiling when he was actually going through terrible sufferings on the cross? What was on the sculptor's mind when he was carving it?

천안함 침몰로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있는 요즈음. 아까운 젊은 나이에 서해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 장병들이 미소 띤 예수님과 함께 이제는 편안한 잠을 이루고 있기를 삼가 기도 올려본다.

These days in Korea, many people are mourning for the deaths of the navy soldiers who lost their lives in the sunken Corvette Cheonan, which was exploded and sank in unexplained circumstances off Baengnyeong Island in the West sea. I hope that these young sailors could rest at peace now with Jesus in Heaven. My sincere prayers and heartfelt condolences for their souls and their bereaved families.

[루카 복음 8,22-25]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어 그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이르시니, 그들이 출발하였다. 그들이 배를 저어갈 때에 예수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 때에 돌풍이 호수로 내리 몰아치면서 물이 차 들어와 그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곧 잠잠해지며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하셨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놀라워하며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물에게 명령하시고 또 그것들이 이분께 복종하는가?"


[Luke 8,22-25]

Now on one of those days Jesus and His disciples got into a boat, and He said to them, "Let us go over to the other side of the lake." So they launched out.
But as they were sailing along He fell asleep; and a fierce gale of wind descended on the lake, and they began to be swamped and to be in danger.
They came to Jesus and woke Him up, saying, "Master, Master, we are perishing!" And He got up and rebuked the wind and the surging waves, and they stopped, and it became calm.
And He said to them, "Where is your faith?" They were fearful and amazed, saying to one another, "Who then is this, that He commands even the winds and the water, and they obey Him?"

Saturday, 3 April 2010

빈 무덤 - The empty tomb

요한 복음 20,1-18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 이미지는 조용하고 잔잔하면서도 사뭇 형언못할 힘을 지니고 있다. 마치 광풍처럼 몰아쳤던 수난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지치고 무기력에 빠진 이들을 위로하듯 잔잔한 평화 가운데 부활 사건이 전개되듯이 말이다.

허나 비록 빈 무덤이 부활을 암시하고는 있으되, 이제 무덤 밖으로 나가서 복음을 살고 선포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부활은 아직 내 삶에서 완성되지 않은 것일런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다볼 산에서 초막을 짓고 주저앉고 싶어하던 베드로에게 '이제 내려가자'고 하셨더랬다. 평온하고 아늑한 빈 무덤에서 '아 그 분이 부활하셨구나'하고 머리로만 깨닫고 있으면, 무덤 밖에서 예수님이 가만 손짓하며 부르시지 않을까. '건동아, 부활한 나는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단다.'



John 20,1-18

The empty tomb is a symbol of the Resurrection. This image is serene and soft but filled with undescribable power. It is indicated in the events after the Resurrection. The peaceful events of the Resurrection took place even before the memories of the stormy events of the Passion of the Christ died out. The Resurrection consoled those who were tired and discouraged.

However, although the empty tomb might symbolise the Resurrection, His coming alive wouldn't be fully realised in our own life unless we go out, live, and proclaim His Gospel. Jesus once said to Peter who wanted to stay in Mt.Tabor, 'Let us go down'. If I stay sitting in the empty tomb, which looks nice and cozy, and only think about His Resurrection in the head, I suppose Jesus would call me outside the tomb saying, 'Benedict, I am here, not there.'

세족례 - Washing of the feet

요한 복음 13,1-20

헤어짐을 앞두고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당신.
그 날밤 그 자리에 모인 그들의 면면은 얼마나도 다채로운지요.
세리에서 열혈당원까지,
성품이 조용한 이에서 큰소리부터 내지르는 이까지...

그토록 서로 다른 이들이,
다른 일 같았으면 굳이 모일 필요도 없는 이들이,
당신의 따스한 손길 아래 하나로 모였습니다.
오로지 당신을 바라보며 하나로 모여 있습니다.
항상 당신을 따르며 하나로 모여 있을 터입니다.

John 13,1-20

Before the farewell on earth,
you are washing your pupils feet with your own hands.
How different are the faces who gathered there at that night?
From tax collector to Zealot,
from calm-tempered to hot-tempered...

They would not have gathered there,
with such a vast contrast in personal profiles.
Only were they gathered in your warm embrace.
Only are they gathered looking into your face.
Only will they be gathered following your footste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