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27 September 2014

베네딕도 성인 St Benedict

St Benedict enthroned with saints (part)
- by Giovanni Mazone (active 1453-1510)
Walker Art Gallery, Liverpool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베네딕도 성인.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없이는 얼마나 깊은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댈 수 있는지, 얼마나 짙은 어두움에 신음하게 되는지 스스로 깊이 아셨을 분. ‘수도규칙서’를 쓰셨다는 이유로 자칫 딱딱하고 권위적인 이미지를 얻으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해하신 따뜻한 분이었을 거라고 믿는다. ‘규칙’은 인간의 나약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아는 성인께서 우리를 위한 길잡이로 쓰셨을 터이다.
St Benedict, whom I deeply respect and admire. He must have known how dark and miserable man can be without the love and grace of God. Since he is known for his ‘Rules’, I am afraid he is sometimes unduly seen as cold and authoritarian for some. But, I firmly believe that he must be a man of warm heart who truly understood the true nature of human being. His ‘Rules’ must be a guide for us.

이 그림의 베네딕도 성인은 사사로운 감정을 넘어선 듯 하면서도 당신을 따라 하느님을 향해가는 순례자들을 사랑과 인자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듯하다. 참된 거룩함을 추구한 삶을 살다보면 삶의 끝자락에서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얻게 되는 것일까…
In this painting, the saint seems to have overcome any excessive emotions. Instead, his eyes are gazing at us, pilgrims on earth, with calm love and gentleness. After a life of genuine holiness, can I dare to say that his face finally comes to resemble his Maker, God the Father?


성 안나와 천사가 함께 한 성 가정 The Holy Family with St Anne and an Angel

The Holy Family with St Anne and an Angel
- by Jacob Jordaens (1593-1678)
Walker Art Gallery, Liverpool

이 그림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한참 들여다 보았다. 이상하게도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다른 유명한 고전 화가들이 묘사한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은 대체로 우아하고 아름다운데, 사실 이 그림에 담긴 성모님과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못생기셨다’고 하기는 좀 죄송스럽고, ‘그닥 아름답지는 않으시다’고나 할까… 청초하고 아름다운 성모님, 순수하고 귀여우면서도 품위를 지닌 아기 예수님…이 아니라 옆집 수더분한 젊은 처자와 묵주를 만지작거리다가 뭔가 관심이 가는지 입을 벌리고 눈을 올려 든 평범하고 퉁실퉁실한 아기다. 우측 상단 배경에서 뒤늦게 뛰어들어 포즈를 잡는 듯한 동네 젊은이. 날개가 없었더라면 천사인지 모를 뻔했다.
In front of this painting, I stopped and stood still for a good while. It had a certain indescribable charm. Usually, Mary and Baby Jesus by other famous classical painters’ brush are more beautiful and elegant. In contrast, the Mary and Baby Jesus in this painting are ‘not so pretty’, if not ‘ugly’. Mary is not necessarily depicted as a pure and beautiful lady. Jesus is not so cute or dignified, either… Instead, we see a young, ordinary woman from next door and a chubby curious baby holding a rosary. I could have almost missed that the young man at the background was an angel, if there were no wings.

별로 ‘아름답지’는 않은데, 왠지 모르게 물끄러미 한없이 바라보게끔 하는 그림이다. 나자렛에서 예수님을 키우던 성모님은 비너스처럼 아름답고 범접 못할 도도한 여인이 아니라 그냥 편하게 다가서서 사는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이웃집 젊은 엄마 같은 분이셨겠다 싶다. 예수님도 무슨 신기가 들린 애늙은이가 아니라 울고 떼쓰고 신기한 것에 눈을 못 떼는 평범한 아기의 모습을 하셨겠다 싶다. 그래서 이 분들이 더 친근하고 더 편안하게 느껴지나보다…

Well, not so ‘beautiful’ in a conventional sense, but I am somehow attracted to the painting. Looking at it, I get to think that Mary in Nazareth was not a Venusian figure with aloof and detached attitude or Child Jesus was not a precocious prodigy. They must have been friendly everyday family next door with whom I could share my life story… Most probably, that’s why I feel so close to this holy family…

아담과 이브 - Adam and Eve

Arthur George Walker(1861-1939) – Adam and Eve
Walker Art Gallery, Liverpool 

지금까지 아담과 이브를 묘사한 그림들은 많이 봤지만 조각을 본 것은 처음이다. 조각상이기에 내게 상대적으로 낯선 이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유독 아담과 이브의 눈을 바라보게 하는 것 같다. 선악과를 따먹고 막 눈이 트인 이 두 사람. 홍채를 파낸 조각가의 솜씨가 남긴 두 사람의 눈은 휑한 공허함으로 가득하다… 하느님의 사랑이 주던 안락함에서 벗어나 처음 ‘죄’의 현실과 그것이 초래한 결과를 대면한 인간의 눈은 두려움으로 녹아 내린 공허함인가…
I have seen many paintings depicting Adam and Eve. But rarely did I see a sculpture of them. Therefore this sculpture is quite new to me. Apart from that, this sculpture draws the attention of the audience to the eyes of Adam and Eve. It is the moment right after they ate the fruit of knowledge. This opened their eyes. The sculptor carved out their iris and now their eyes are full of emptiness… Perhaps the first man and woman had to leave the comfort of God’s love and when faced with the reality and results of the sin, their eyes were filled with emptiness caused by fear.

그런데 그 다음으로 눈이 가는 곳은 이브와 아담의 손이다. 이브는 온 몸을 휩싸는 두려움 앞에서 남편 아담의 손을 꼬옥 쥐고 있다. 그런데 아담은 마치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은데도 달리 쥘 곳이 없는 듯한 손을 허리 아래로 내리고 있다. 
And next, the audience’s attention is led to the hands of Adam and Eve. Seized with fear, Eve is holding - or almost squeezing - her husband’s hand. But Adam, though apparently wishing to find something to hold, drops down his empty left hand under his waist.

작가는 죄를 짓고 그 결과를 대면하는 공포와 공허의 순간을 포착했다. 그리고 이는 아담과 이브의 눈과 아담의 손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바로 그 다음 단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브는 아담의 손을 부여잡지만 아담은 포기한 듯 힘이 들어간 손을 하릴없이 그저 허리 아래로 내리고 있다. 만약 그가 손을 들어 하느님을 찾았더라면? 하느님은 그 따스한 손을 내밀어 나약하고 헐벗은 인간을 위로해 주시지 않았을까? 아담의 망설임 덕분에, 인간은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가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로 오시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The sculptor captures the moment of fear and emptiness where the first humans commit a sin and face its consequences. And their eyes and hands tellingly show it to that effect. However, I think the truth of Christianity comes at the next move. While Eve is holding Adam’s hand, Adam is lowering down his hand as if he gives up any hope of finding something or someone to hold. But what if he lifted up his hand and sought for God? Wouldn’t God have extended his warm hands towards these vulnerable humans and consoled them? Thanks to Adam’s hesitations, humans had to wait for a long time for the coming of Jesus, the only son of God, among us.

그러나 동시에 아담의 손을 부여잡은 이브의 손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 준다. 두려움과 공허함의 그 순간에도 인간이 인간의 손을 잡을 줄 알 때에, 그리고 맞잡은 손이 하느님을 향해 갈 수 있을 때, 용서가 있고 치유가 있고 화해가 있고 평화가 있고 진리가 있는 것이리라…
But, at the same time, Eve’s hand – the hand that is holding Adam’s – gives us a message of hope. Even in the midst of fear and emptiness, if a human can hold another human’s hand, and if their holding hands can be lifted up to God, there will be found forgiveness, healing, reconciliation, peace and truth.

악의 평범성 The Banality of Evil - Lk 9,43-45

악의 평범성 - 루카 9,43-45에 대한 단상



그때에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While everyone was amazed at all that he was doing, he said to his disciples, "Let these words sink into your ears: The Son of Man is going to be betrayed into human hands." But they did not understand this saying; its meaning was concealed from them, so that they could not perceive it. And they were afraid to ask him about this saying.

어젯 밤에 본 영화 '한나 아렌트'에서 아렌트는 생각을 멈출 때 얼마나 커다란 악이 자행될 수 있는지를 역설했다. 더 큰 맥락을 놓친 때, 아니 내려 놓은 채, 자기 자신에게 모든 생각이 집중되고 타인과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며 소시민적으로 살아가는 태도. 짐짓 무해한 듯이 보이는 듯한 이 태도가 자칫하면 거대한 악과 결부되어 개인이 그 악의 톱니바퀴로 전락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I saw the movie 'Hannah Arendt'. In the movie, Arendt stressed how a great evil could be perpetrated if thinking stops. My understanding is that a seemingly harmless attitude of Kleinbürger, who does not care about the bigger context of his surrounding society and environment, and who concentrates all his 'thoughts' on himself can make a person a mere cog that functions for a greater evil.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문득 예수님께서 왜 당신이 인간들에게 '배신'당하실 것에 대해 이토록 강조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어서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떠오르면서, 인간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단순히 적극적인 결심에 의한 선택인 것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을 행하려는 의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내부에 깊이 자리한 악의 뿌리깊은 속성이 예수님을 거부하게 만드는 '필연성'마저 낳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인간의 죄성은 결코 심오할 수 없는 '평범성' 때문에라도 '심오'한 것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만으로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죄성을 통찰하신 것이리라.
Reflecting on today's Gospel, I was wondering why Jesus stressed so strongly on human's 'betrayal' towards him. Then the phrase, 'the banality of evil' coined by Arendt, came to my mind and I thought the human betrayal to Jesus was perhaps not meant to be something conscious and intentional. We, humans, betray Jesus perhaps not out of our conscious choice but due to a certain 'necessary condition' caused by the Fall. This deep-rooted sinfulness... Our sinfulness is deep and persistent because of its banality... Jesus was insightful of our sinfulness which is too overwhelming for our own attempt to overcome it.

하지만, 그러한 지적에 그치고 만다면 결코 복음일 수 없다. 과연 말씀이신 예수님 당신이 우리에게 오신 것 자체가 복음이다. 인간이 당신을 거부할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오셨다. 평범하고 '찌질한' 악의 힘이 당신을 거부하고 농락할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오셨다. 그것은 사랑이다. 당신 스스로를 약하고 상처받을 존재로 내려 놓으시면서 악의 한 가운데로 오신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은 점차 인간을 죄성에서 구해 주시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주실 터이다.
However, if that is the end of the story, it cannot be a 'Good News'. The fact that Jesus, the Word of God, came to us is already a Good News. Jesus came in the full knowledge of the eventual betrayal from the human beings. He came to us in the full knowledge of banality and cowardice of the power of evil which will deny and ridicule him. That is LOVE. A love that sets himself down as a vulnerable being. And that love would soon save humanity from the sinfulness and bring us back to our genuine self as Imago Dei.

우리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면,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의 사명을 위해서 파견받는다면, 나 역시 거부당하고 무시당하고 상처받는 곳으로, 나의 갈릴래아로, 주님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를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시켜 주실 것임을 믿으면서.
If we are saved by Jesus through his life, death, and resurrection, and at the same time are sent on his mission, I must also be able to go to my 'Galilee', where I have to risk being denied, ignored, and ridiculed. To be able to go on a mission where God calls me, I believe he will prepare myself as 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