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23 November 2014

그리스도왕 대축일 (마태 25,31-46) - Christ the King (Mt 25,31-46)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성당, 리버풀
St. Francis Xavier Church, Liverpool

오늘은 연중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
미사 강론 서두로 주례 신부님께서 갑자기 우주의 역사와 크기에 대한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말씀하셨다. 뜬금없는 말씀인가 싶었는데, 신부님의 뜻은 우주 만물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그저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왕'인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기에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으로도 오시는 분, 우주의 신비가 큰 만큼 우리들 각자의 신비도 더할 나위 없이 장엄하다는 것... 그리고 그분께 감사드리는 마음을 말씀하신다. 제단 뒤로 높이 걸려 있는 십자고상을 보며 가만히 감사하다고 말씀드려 보았다. 언젠가, 아무런 단서 조건 없이 오롯한 감사의 마음을 드릴 날이 올 수 있을까? 그것을 위해 일상을 사는 것이고 영적인 수행을 하는 것이다.
Today is the last week of the ordinary time in Church calendar: Christ the King.
At the start of his homily, the father suddenly spoke about scientific facts about the age and size of the universe. I was wondering why he said those things and it turned out that he was emphasising Christ is the King of everything in the universe. At the same time, He is not only 'the King' who governs the world but also 'the Christ' who personally comes to each one of us. As much as the mystery of the universe is profound, the mystery of our individual human person is also majestic, he says. And he encourages us to say thanks to God. Looking at the crucifix hung above the altar, I whispered a thank-you to Him in my heart. Can I say someday a thank-you to Him unconditionally? I live my daily life and perform spiritual exercises for that.

오늘 복음 말씀은 흔히들 마태 복음에서 '최후의 심판'을 떠올리는 부분이다. 다시금 읽으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의로운 이들이나 그렇지 못한 이들이나 자신들이 한 일, 혹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크게 의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좋은 일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행한 자신을 크게 생각하지도 않고, 좋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 일을 할 기회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결국 덕 윤리학에서 이야기하듯이 매 순간 순간을 복음의 가치에 기초해서 살아가려는 노력이 어느 새 제2의 천성이 되어버리면 굳이 의로운 일과 자비를 베풀었다고 해서 우쭐대거나 스스로를 높이 살 것도 없이 될 것이다. 또한 복음의 가치가 삶에 스며들기보다는 그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혹은 마지못해 규율을 따르는 것에 불과하다면 굳이 의로운 일과 자비를 베풀 기회를 나서서 찾지도 않을 것이고 그런 행위를 하지 않은 것을 의식하지도 못할 것이다.
Today's gospel is a part in Matthews which people often associate with the Last Judgement. Reading the passage again, what strikes me is that whether the righteous or not, both of them are not conscious of what they did or did not do. Neither do the righteous think highly of themselves because of their good deeds, nor the evil think about the lost opportunities in which they could've performed acts of goodness. After all, as virtue ethics stresses, if our efforts to live out the gospel values become our second nature, we wouldn't boast about our righteous and merciful deeds. On the other hand, if the gospel values are just for a show or become an external rule, we wouldn't bother to look out for the opportunities to do something righteous and merciful, let alone are conscious of them.

예수께서는 당신의 형제자매들인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베푸는 행위가 곧 당신께 베푸는 행위라고 하신다. 이들 가장 작은 이들은 누구일까. 복음이 참으로 내 삶의 방향타가 되려면 복음 말씀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매 번 내 삶 속에서 새롭게 찾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눈에 띄게 소외되고 있는 이들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느님 복음의 빛 안에서 평온을 누리지 못하고 삶의 무게에 짓눌려 남몰래 신음하는 이들도 세상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이들이다. 그런 만큼 가깝고 먼 곳의 이웃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아야겠다. 그 길은 곧 '나' 자신만의 틀을 벗어나 주님을 내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길이다.
Jesus says the deeds done to 'one of the least of them', who are His brothers and sisters, are done to Him. Who are these 'least people' in my life? If the gospel is to be rudder and compass of my life, I have to see with a new perspective what it says means in my life. Maybe, those least people are not only those who are explicitly excluded from the society but also those who are suffering inwardly under the heavy burden of life without peace. Then I have to be more careful to listen to those inner cries of my neighbours far and near. That is the way to get out of my shell of 'ego' and serve the Lord in the innermost sanctuary in my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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